상주 전투 사료집 A
상주 전투 사료집
https://cafe.naver.com/nagwangfal/book4837200/14041
//
"정경세가 아뢰기를,
“근일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이일(李鎰)을 많이 헐뜯고 있습니다만 상주(尙州)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변 초기에 영남 사람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왕사(王師:서울 군대)를 크게 기다렸고, 열군(列郡)의 군졸들은 통속(統屬)할 곳이 없었는데 이일이 상주에 이르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군사를 먹이고 성의 있는 말로 일깨움으로써 하루 사이에 장사 3천 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평야로 나아가 진을 치고 진치는 법을 배워 익힐 무렵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앞 시내에 도착하여 넓은 들판에 가득 차 있었는데도 이일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힘을 다해 싸우던 중 윤섬(尹暹)과 박호(朴箎)가 모두 전사하자 이일이 단기(單騎)로 탈출하여 충주(忠州)에 물러나 있다가 신립(申砬)과 같은 날 패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산(釜山)에서 한번 패배한 뒤로 왜적과 대항하여 싸운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유독 이일만이 군졸을 규합하여 왜적과 접전했으니, 끝내 비록 패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사람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증(李增)이 아뢰기를,
“왜적은 접전할 때에 모두 조총(鳥銃)으로 선봉을 삼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우리 나라는 오합지졸로 선봉을 삼고 용맹한 군사들은 뒤에 있게 하였으므로 선봉대가 무너지자 온 군대가 덩달아 도망쳤습니다. 강찬(姜燦)이 단천 군수(端川郡守)가 되었을 때 왜적과 접전하면서 잠시 전진하고 잠시 후퇴하면서 거짓으로 패하여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적의 탄환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려 군사를 내보내어 짓밟았으니, 강궁(强弓)의 아래에서 전멸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보잘것없는 적이니, 만약 세 부대로 나누어 차차 포(砲)를 쏘면서 교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더라면 어떻게 감히 당해냈겠는가.”
하였다."-선조 65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7월 24일(을미) 1번째기사
대신들과 인견하다
이일은 상주에서 민병대 1천에 군사 2천을 얻었음.
선조수정실록,당시 사관의 일기인 기재사초 보면 이일은 서울 출발시 정예기병군관 60명에 군사 4천을 거두고 출발함.
상주에 도착해선 군사가 6천이 되고 추가로 상주민병대 1천도 얻었다구 나옴.
"이일이 장기(壯騎)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선조수정실록
李鎰率壯騎軍官六十餘人行, 收兵得四千餘人, 促程馳赴。
"이에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선조수정실록
吉願自出招集, 乃達夜搜索村落間, 得數百人(수백인), 皆農民也。 鎰又發倉廩, 誘募散民, 得數百人(수백인), 倉卒徧伍, 合兵僅六千餘人(합병근6000여인)。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기재사초 하 임진잡사
서울 출발시 이일군 = 장기군관 60명에 군사 4천명
상주 도착 후 상주 민병대 수백명 (990명) + 수백명 (990명) 을 수합후의 이일군 = 6천명
그러나 사실 김여물이 군관 80명에 장사 8천명 (군관 1명당 100명 거느림.)을 거느리고 조령으로 간걸 보면 이일은 6천명을 거느리고 서울 출발해서 상주에 도착해서 상주민병대 1~2천을 거두었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은근슬쩍 4천에 상주에선 민병대 수백+수백을 얻엇다해서 이일군 숫자를
좀더 줄이려고하는거같음.
장기군관 60명이 정예기병 군관을 뜻하므로 6천 궁기병이 이일에게 주어졌다고 보는게 맞음.
"이일이 장기(壯騎)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선조수정실록
李鎰率壯騎軍官六十餘人行, 收兵得四千餘人, 促程馳赴。
"이에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선조수정실록
吉願自出招集, 乃達夜搜索村落間, 得數百人(수백인), 皆農民也。 鎰又發倉廩, 誘募散民, 得數百人(수백인), 倉卒徧伍, 合兵僅六千餘人(합병근6000여인)。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기재사초 하 임진잡사
1. 이일은 장기군관 그러니까 정예기병군관 60명을 거느리고(率) 길을 떠나 각 군관에 소속되어있는 '병兵'을 거두어 얻은게 4천여인
2. 이일이 상주에 도착해서 상주 농민 민병대를 얻은게 1천명. 상주 민병대 1천을 얻고 매우 급작스럽게(창졸) 대오를 편성함.
이때쯤 서울에서 온 또 다른 '병兵'이 와서 합쳐지니 6천명인거임.
김여물이 군관 80명에 8000 장사이니 이일도 군관 60명에 6000병사인게 당연함.
군관 1명당 100명을 거느림.
징비록엔 이일군을 정예병 300명만 적어놓고 그 외 군사수는 의도적으로 적지않고있다.
고니시 종군 중 텐카이의 서정일기에는
"4월25일 맑음, 오각에 상주에 돌입. 대장 이욱(이일의 오류)을 패배시킴. 북으로 공격하여 전과 참수 300급" - 일본 서정일기 4월24일자
라고 적혀있다. 여기 나와있는 참수 300급은 정예병 300명의 모가지일 것이다.
짤방의 선조수정실록을 보자.
선조수정실록 : 이일은 서울에서 정예기병군관 60명에 군사 4천을 데리고갔다.
선조수정실록 : 이일은 상주에 도착했을때는 군사가 6천여명이었다.(군관 60명당 100명씩 거느린 형태) 민병대 1천명도 별도 부록으로 추가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기재사초 하 임진잡사
당시 사관이 피란 중에 적은 기재사초 : 이일이 상주에서 얻은 군사(민병대)는 1천이었다.
"25일. 아침에 이일이 오히려 적이 없다고 하여 개령 사람을 끌어내어 베어서 여러 사람 앞에 돌리고 인하여 편성(編成)한 민병과 경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을 북쪽 시냇가에서 진법을 연습하느라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대장의 기와 북을 세우고 이일은 그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과 수찬(修撰) 박지(朴箎)와 상주 판관 권길과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등은 다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 있었다."-재조번방지
이일군의 편성 = 서울 장기군관 60 , 6000 군사 + 민병대 1천
프로이스 일본사를 보자.
"....음력 4월 24일 상주라는 성채의 전방에 있는 산 위에 조선의 서울로부터 온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 저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주 단시간 내에 그들을 패주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들의 총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 이상을 무찔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나머지 적병은 울창한 숲 속으로 도주하였으므로 전부 소탕하여 전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합니다...."-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데요시의 편지
상주민병대 1천 , 정예병 300명만 죽고 나머지 이일군은 모두 숲으로 무사히 후퇴하였다.
"이일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巡邊使)로서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지켰습니다. 적이 정탐하여 방비가 없음을 알고 밤새 재를 넘어 곧바로 나아가 성을 에워쌌습니다.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게 되자, 우리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금탄(金灘)에 빠지니,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충주는 경도(京都)의 상류에 있으니 충주를 이미 잃었으면 경성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경도 사람들은 이일·신립이 다 중병(重兵 : 많은 군사)으로 험애(險隘)를 막고 있었으므로 날마다 승전의 소식을 기다렸는데 패하였다는 보고가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또 성안(서울)의 정장(精壯)도 먼저 신립·이일과 여러 장관(將官)들이 뽑아 데려 갔고, 제도(諸道)의 원병도 미처 불러 모으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임금은 사세가 이미 급박해진 것을 알고 왕자(王子)와 재신(宰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사방에서 불러 모으게 하고, 자신은 서방으로 옮아가 상국(上國) 지방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정성을 바쳐 천자의 뜰에서 은혜를 빌어 회복을 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나라를 지키는 떳떳한 도리는 아닐지라도 또한 일을 헤아리는 권의(權宜)인데, 과연 천자의 생성(生成)하는 은혜를 입어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적변이 생긴 이래의 대체적인 사정입니다."-선조 4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윤11월 14일(갑오) 2번째기사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 유성룡을 인견하고 중국 사신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다
선조실록 : 이일군은 많은 군사다.
[출처] 이일 사료집 (『미마나 교회 (임나任那 하나로우花郞 Church)』)
"적병이 충주(忠州)에 침입하였는데 신입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처음에 신입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얼마 있다가 이일(李鎰)이 이르러 꿇어앉아 부르짖으며 죽기를 청하자 신입이 손을 잡고 묻기를,
“적의 형세가 어떠하였소?”
하니, 이일이 말하기를,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신입이 쓸쓸한 표정으로 의기가 저상되자 김여물(金汝岉)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상촌집의 60만 왜군을 말하는 것)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입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계를 올려 이일을 용서하여 종군(從軍)하게 해서 공로를 세우도록 청하고 드디어 (이일의) 군사를 인솔하여 도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선조수정실록
이일군 = 기마병으로 편성되어있어서 신립에게 인솔받음.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3번째기사
왜적이 밀양 지역에 쳐들어오다
왜적이 밀양(密陽) 지역에 들어오니 부사 박진(朴晉)이 작원강(鵲院江)의 잔교(棧橋)를 지켰는데 좁은 잔교를 점거하여 활을 쏘면서 버티자 적이 여러날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적병이 이웃 양산군(梁山郡)을 함락시키고 우회하여 후면으로 쳐들어오니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이에 박진이 본부로 달려 돌아와 병고(兵庫)와 창곡(倉穀)을 태워버리고 도망하였다. 이각(李珏)은 본영에 돌아와서도 성을 지킬 계획은 하지 않고 밤에 그의 첩을 내보내면서 창고에 간직해 둔 무명 1천 필(疋)을 가져다 주어 함께 싣고 가게 하고, 그도 역시 새벽을 틈타 도망하니, 모든 군사가 크게 무너지고 적병이 몰려들어 왔으나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도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감사(監司)는 처음에 진주(晉州)에서 변고를 듣고 동래로 달려가다가 중도에 이르러 적병이 이미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 우도(右道)로 달려갔는데, 조처할 바를 모른 채 그저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주민들을 타일러 적을 피하게 할 뿐이었다.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賓廳)에 모여 청대(請對)하였으나 비답하지 않았는데, 이는 상의 뜻을 진정시키려는 의도였다. 계청(啓請)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에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시켜 경주 부윤으로 삼았다. 그러나 모두 현재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당시 사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으므로 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2장 B면
【영인본】 25책 611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인사-임면(任免)
"....음력 4월 24일 상주라는 성채의 전방에 있는 산 위에 조선의 서울로부터 온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는 대략 2만명으로 그들 사이에는 고위 지휘관으로 3명의 귀족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주 단시간 내에 그들을 패주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들의 총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 이상을 무찔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나머지 적병은 울창한 숲 속으로 도주하였으므로 전부 소탕하여 전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합니다...."<u>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데요시의 편지</u>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7일(병오) 1번째기사
변보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일을 순변사로 보냈으나 패배하다
포시(晡時)에 변보(邊報)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일(李鎰)로 순변사(巡邊使)를 삼아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尙州)에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종사관 박호(朴箎)·윤섬(尹暹) 등은 다 전사하고 이일은 단기(單騎)로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1장 A면
【영인본】 21책 483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軍事)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7일(병오) 3번째기사
적이 상주에 이르러 통사 경응순을 보내 화친을 청하다
적이 상주에 이르자 통사(通事) 경응순(景應舜)을 보내어 서계(書契)를 가지고와 화친을 청하고 하나의 붉은 깃발로 표신을 삼았다. 상이 이덕형을 보내어 침범한 까닭을 묻고자 하였는데 덕형이 용인(龍仁)에 이르렀을 때 적이 벌써 재를 넘은 까닭에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1장 A면
【영인본】 21책 483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軍事)
"○ 25일에 적이 상주(尙州)를 함락시키자 순변사 이일(李鎰)이 달아나 충주로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교리(校理) 윤섬(尹暹)ㆍ박지(朴箎)와 방어사의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ㆍ판관 권정길(權井吉)이 죽고, 조방장 변기(邊璣)도 죽었다.
○ 당초에 이일(李鎰)이 서울 정예병 3백 명을 거느리고 가려고 병조에서 선발해 놓은 병안(兵案)을 가져다 보니 여염 시정(市井)의 백도(白徒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장정들)ㆍ서리(胥吏)ㆍ유생들이 반을 차지했다. 임시 점고하니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詩卷)을 가지고서, 아전들은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병역을 면하고자 하소하는 자가 뜰에 꽉 차서 보낼 사람이 없었다. 이일이 3일이나 못 떠나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이일만 먼저 출발하고 별장(別將) 유옥(兪沃)이 나중에 거느리고 가도록 하였다. 《징비록》
○ 21일에 이일이 문경(聞慶)에 이르러 급히 장계했는데, “오늘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 감히 당할 사람이 없으니 신은 죽음을 각오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기재잡기》
○ 처음에 경상도 수령들이 군사를 이끌고 대구(大丘)로 가서 냇가에서 노숙(露宿)하며 순변사를 기다린 지 이미 수일 되었다. 적의 소식이 점점 가까워지자 군사들은 스스로 서로 놀라고 요동하였다. 그때 큰 비가 내려 옷은 젖고 군량은 떨어지니 밤중에 다 흩어져버려 수령들도 모두 홀로 말을 타고 분주히 돌아갔다. 이일이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산중으로 도망했고, 판관 권정길(權井吉)만 혼자 있었다. 이일이 군사가 없음을 책망하여 그를 베려 하다가 용서하고 군사를 모으게 했다. 이일이 또 창고문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며 흩어진 백성들을 달래어 모이도록 해서 수백 명을 얻어 군대를 편성했다. 저녁에 개령(開寧) 사람이 와서 적이 왔다고 알렸다.
이일이 여러 사람을 의혹시킨다고 죽이려 하니 그 사람이 형에 임박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며, “우선 나를 가두어 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적이 안 오거든 죽여도 늦지 않다.”고 해도 이일이 듣지 않았다. 그날 밤에 적이 선산에서 진군해 와서 이미 남면 20리 되는 장천리(長川里)에 진을 쳤는데, 이일의 군사는 척후병이 없으므로 그것도 알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 적의 척후병이 두셋씩 짝을 지어 북천(北川)의 이일의 진 앞에 와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수차나 갔다왔다 했으되 군중에서 감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이일이 적의 포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성밖에 진을 치고 그 군사와 백성 8, 9백 명으로 북천 가에서 훈련했다.
○ 이달 25일에 성안을 바라보니 두어 군데 연기가 일어났다. 군관을 시켜 알아보고 오게 했는데, 적이 다리 밑에 잠복해 있다가 조총으로 군관을 쏘아 머리를 베어갔다. 우리 군사들이 이것을 바라보고 기가 죽었다. 얼마 안 있어 적이 몰려와서 조총으로 공격하니 맞은 자는 즉시 죽고, 우리 군사가 활을 쏜 것은 수십보쯤 가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적은 이미 좌우로 나누어 포위해 왔다. 이일은 말을 달려 북쪽으로 달아나고 종사관 윤섬ㆍ박지 교리ㆍ판관 권정길은 모두 죽었다. 《조야기문》 《징비록》
○ 이때 적은 무릎으로 기어 전진하여 잠깐 동안에 벌판을 덮었다. 우리 군사는 놀라 흩어지고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였다. 《일월록》
○ 처음에 이일이 윤섬의 친구 한 사람을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윤섬이 이일에게 가서 말하기를, “그 사람은 홀어머니가 계시고 다른 형제가 없어 그 어머니가 밤낮으로 울고 있으니 공은 잘 생각해 주시오.” 하니 이일이 허락하면서, “국가의 존망이 장차 여기에서 결판날 것이니 종사관은 아주 잘 골라야 할 터인데 그대보다 나을 사람이 없겠네.” 하고 데리고 가려 하였다. 섬이 그 어머니에게 들어가 하직하니 어머니가 울면서 말하기를, “너는 어째서 우리 둘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죽을 땅에 가느냐.” 하였다. 윤섬이 대답하기를,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부모의 은혜와 나라에 대한 의(義)를 다 온전하게 할 수 없으며, 또 집에는 동생이 있으니 어머니를 모실 것입니다.” 하였다.
동생 윤탕(尹逿)이 손을 잡고 울면서, “형은 어찌 친구만 생각하고 부모는 잊어버린 듯이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오?” 하니 윤섬이, “그는 형제도 없어 형편이 가긍하지만 우리 집은 네가 있을 뿐 아니라, 또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어찌 사정(私情)을 돌아보겠느냐.” 하였다. 상주 북쪽 가마소[甑淵] 위에 이르렀을 때 적군이 졸지에 닥쳤다. 이일이 달아나면서 윤섬에게, “헛되게 죽기만 하는 것은 쓸 데 없으니 나를 따르라.” 하니 윤섬이 대답하기를, “장차 임금을 뵈올 수 없다.” 하고 박지와 함께 죽었다. 윤섬의 행장
○ 박지는 김수의 사위이므로 이일이 김수의 도움이 있을까 해서 수행하기를 청했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일월록》 ○ 박지는 18세에 장원하였다.
○ 적군이 이일을 급박히 추격해 오자 이일이 말을 버리고 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나 문경에 이르러 급히 장계하고 죄를 기다리다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새재를 버리고 신립의 군중으로 갔다. 《징비록》
○ 21일에 이일의 패보가 왔다. 궁중에서도 역시 굳은 뜻을 갖지 못하고 드디어 미투리[繩鞋] 등 멀리 갈 행구(行具)를 사들이고, 또 사복시(司僕寺)에 명해서 영강문(永康門) 안에 말을 대기하게 하였다. 《기재잡기》"-연려실기술
"당시에 경상도 순찰사 김수(金睟)가 우도에 있었는데 적병이 중간을 질러 꿰어서 좌도로 더불어 소식이 통하지 못하므로 김늑이 본도의 민정을 상세히 알아서 안집(安集)시킬 수 있기 때문에 보낸 것이다. 김수가 처음에 제승방략(制勝方略)으로써 군사를 나누었다가 각 고을에 통첩을 내리어,
“각기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목적지에 모이라.”하니, 이때에 이르러 문경(聞慶)이하의 수령들이 모두 군사를 끌고 대구로 와서 시냇가에 노숙(露宿)하면서 순변사를 기다린 지가 수일이었다. 순변사는 미처 오기 전에 적병이 점점 가까이 닥치니 모든 군사들이 서로 놀라 요동하였다. 마침 큰비가 내려 의장(衣裝)이 모두 젖고 양식이 계속되지 못하여 밤중에 다 무너져 흩어지고 수령들은 모두 단기(單騎)로 달아나 돌아갔다.
순변사 이일(李鎰)이 문경에 들어오니 성중이 이미 비어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일이 스스로 창고의 곡식을 열어 거느리고 온 군인을 먹이고 함창(咸昌)을 지나서 상주(尙州)에 도착하니 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를 중도에서 기다린다고 핑계하고 산중으로 도망하여 들어가고 홀로 판관(判官) 권길(權吉)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이 군사가 없다고 권길을 꾸짖고 뜰에 끌어내어 베고자 하니, 권길이 애걸하며 나아가서 군사를 불러 모으기를 자원하여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이튿날 아침에 겨우 수백 명을 얻어 왔는데 모두 농민이었다. 이일이 상주에 머문 지 하루 동안에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을 꼬여 모이게 하니 산골로부터 하나하나 오는 자가 또 수백 명이었다.
창졸간 군대에 편입하여 군사를 만들었으나 하나도 싸울 만한 자가 없었다. 이때 적이 이미 선산(善山)에 이르렀다. 그날 저물녘에 개령현(開寧縣) 사람이 와서 적이 이미 가까워졌다고 보고하자 이일(李鎰)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의혹시킨다 하여 장차 베려 하니, 그 사람이 크게 외치기를,
“우선 나를 가두었다가 내일 아침까지 적이 오지 않으면 죽여도 늦지 아니합니다.”하였다. 이일(李鎰)이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 그날 밤에 적병이 장천(長川)에 둔쳤으니 상주까지의 거리가 20리였다. 그러나 이일의 군사는 척후병이 없었으므로 적이 가까이 와도 알지 못하였다.
○ 25일. 아침에 이일이 오히려 적이 없다고 하여 개령 사람을 끌어내어 베어서 여러 사람 앞에 돌리고 인하여 편성(編成)한 민병과 경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을 북쪽 시냇가에서 진법을 연습하느라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대장의 기와 북을 세우고 이일은 그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과 수찬(修撰) 박지(朴箎)와 상주 판관 권길과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등은 다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 있었다.
조금 있다가 두어 사람이 숲 사이로부터 나와서 배회하며 둘러보고 돌아갔다. 여러 사람은 적의 척후병인가 의심하였으나 개령 사람의 죽음에 징계되어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또 성중 두서너 곳에서 연기가 일어나는 것이 바라보였다. 이일이 비로소 군관 한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 탐지하게 하니, 군관이 말을 타고 가는데 두 마부(馬夫)를 시켜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갔다.
적이 먼저 다리 밑에 매복하였다가 조총으로써 군관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어가니 우리 군사들이 바라보고 기세가 꺾였다. 조금 있다가 적이 크게 이르러 서로 대진(對陣)하여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砲)를 쏘아 철환이 비오듯 하니 이일(李鎰)이 대적하지 못하고 군중이 요란하여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일이 급히 군사들을 불러 활을 쏘게 하나 화살이 수십 보 쯤 가자 번번이 떨어져서 적을 해치지 못하였다. 적이 이미 좌우익으로 나누어 나와서 깃발을 들고 군사 뒤를 둘러서 포위하여 들어오면서 크게 부르짖으며 진에 돌입하였다.
이일이 급박함을 알고 말을 돌려 북으로 달아나니 군사들이 크게 요란하여 각기 도망하였으나 한 사람도 벗어난 자가 없었고, 종사관 이하는 말을 타지 못하고 모두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적이 이일을 매우 급히 추격하니 이일이 말을 버리고 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문경에 이르러 종이와 붓을 구하여 패한 실상을 장계로 올리고 물러나 조령을 지키고자 하다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충주로 달려갔다."
- 재조번방지 1(再造藩邦志 一)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재조번방지 1(再造藩邦志 一)
"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국조보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출정할 때 단지 군관(軍官) 및 사수(射手) 60여 인을 이끌고 가면서 내려가는 도중에 군사 4천여 명을 거두워 모았다. 4월 24일 상주(尙州)에 도착했는데, 이일의 생각에 우리 군사가 오합지졸인 만큼 마땅히 습진(習陣)시켜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을 미처 반도 펼치기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별수없이 대진(對陣)하였으나, 교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를 쏘아대 철환(鐵丸)이 비오듯 쏟아졌으므로 아군이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적이 함성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자 우리 군사가 궤멸되면서 사상자가 무더기로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서 이일만 단기(單騎)로 몸을 빼어 달아나고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ㆍ박지(朴篪) 등은 모두 죽었다."-상촌집
"순변사 이일이 상주성 밖에서 맞아 싸우려 하였으나, 미처 포진하기도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러 조총(鳥銃)으로 사면에서 공격하니, 군사는 무너지고 이일은 겨우 몸만 피하였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 수찬(修撰) 박호(朴箎), 상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죽었습니다. 상주 백성들이 곳곳에서 서로 모여 힘껏 싸우고 한 사람도 투항한 자가 없어 죽은 자가 더욱 많고, 온 경내가 황폐화되었습니다.
이일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巡邊使)로서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지켰습니다."-선조 4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윤11월 14일(갑오) 2번째기사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 유성룡을 인견하고 중국 사신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다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 또 해암(蟹岩)에서 승전한 일이 있으므로 조정에서는 특별히 그를 우대하였다. 대탄(大灘)의 군사가 무너지자, 이양원(李陽元) 이하가 혹은 흩어져 도주하고 혹은 북도(北道)로 들어갔는데, 이일만은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향하니, 조정에서 그를 더욱 가상하게 여겼다. 그는 도중에 먼저 사람을 보내어 성을 지키는 방책을 올렸는데, 매우 조리가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기쁘게 여겼다."-기재사초 하 임진잡사
[출처] 상주 전투 사료 (『미마나 교회 (임나任那 하나로우花郞 Church)』)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3번째기사
왜적이 밀양 지역에 쳐들어오다
왜적이 밀양(密陽) 지역에 들어오니 부사 박진(朴晉)이 작원강(鵲院江)의 잔교(棧橋)를 지켰는데 좁은 잔교를 점거하여 활을 쏘면서 버티자 적이 여러날 진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적병이 이웃 양산군(梁山郡)을 함락시키고 우회하여 후면으로 쳐들어오니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이에 박진이 본부로 달려 돌아와 병고(兵庫)와 창곡(倉穀)을 태워버리고 도망하였다. 이각(李珏)은 본영에 돌아와서도 성을 지킬 계획은 하지 않고 밤에 그의 첩을 내보내면서 창고에 간직해 둔 무명 1천 필(疋)을 가져다 주어 함께 싣고 가게 하고, 그도 역시 새벽을 틈타 도망하니, 모든 군사가 크게 무너지고 적병이 몰려들어 왔으나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도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감사(監司)는 처음에 진주(晉州)에서 변고를 듣고 동래로 달려가다가 중도에 이르러 적병이 이미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 우도(右道)로 달려갔는데, 조처할 바를 모른 채 그저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주민들을 타일러 적을 피하게 할 뿐이었다.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賓廳)에 모여 청대(請對)하였으나 비답하지 않았는데, 이는 상의 뜻을 진정시키려는 의도였다. 계청(啓請)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에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시켜 경주 부윤으로 삼았다. 그러나 모두 현재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당시 사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으므로 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2장 B면
【영인본】 25책 611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인사-임면(任免)
宣修 26卷, 25年(1592 壬辰 / 명 만력(萬曆) 20年) 4月 14日(癸卯) 3번째기사
왜적이 밀양 지역에 쳐들어오다
○賊入密陽境, 府使朴晋守鵲院江棧, 棧路狹, 晋發筒箭拒射, 賊連日不得進。 旣而, 賊兵傍陷梁山郡, 遶出其後, 守兵望之皆散。 晋馳還府城, 焚兵庫、倉穀而遁。 李珏還營, 不爲城守計, 夜出其妾, 取庫藏木千匹, 與之載去, 珏亦乘曉逃去, 衆軍大潰, 賊兵長驅, 無敢拒者。 金海府使徐禮元棄城遁。 監司初在晋州聞變, 馳往東萊, 至中路聞賊兵已近, 還走右道, 不知所爲。 但檄列邑諭民, 避賊而已。 賊報之至也, 大臣、備邊司會賓廳請對, 不答, 上意欲鎭定也。 啓請以李鎰爲巡邊使, 下中路; 成應吉爲左防禦使, 下左道; 趙儆爲右防禦使, 下西路; 劉克良爲助防將, 守竹嶺; 邊璣爲助防將, 守鳥嶺; 起復前江界府使邊應星爲慶州府尹。 然皆無見兵, 只令自擇軍官以行。 自此陷敗之報續至, 都城大震, 時徵四方兵, 未至。 李鎰率壯騎軍官六十餘人行, 收兵得四千餘人, 促程馳赴。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2장 B면
【영인본】 25책 611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인사-임면(任免)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8번째기사
왜적이 상주에 침입하자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다
왜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였다. 처음에 경상 감사 김수(金晬)가 적변(賊變)을 듣고는 곧바로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의거하여 군대를 분배시킨 뒤 여러 고을에 이문(移文)하여 각각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약속된 지역에 나아와 주둔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조령 밑의 문경(聞慶) 이하 수령들이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大邱)로 달려와 둔병하여 원야(原野)에서 노숙하였는데 전혀 통제가 되지 않은 채 순변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적의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많은 군사가 놀라 동요하여 밤중에 진이 저절로 무너졌는데 수령들이 단기(單騎)로 도망하여 돌아왔었다.
그 뒤에 이일이 비로소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이미 고을이 한 사람도 없이 텅 빈 상태였다. 이에 스스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들을 먹이고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산곡(山谷)에 들어가 숨었다. 이일이 판관 권길(權吉)을 잡아들여 군대를 뽑도록 당부하였으나 한 사람도 얻지 못하였으므로 참(斬)하려 하였다. 이에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왜적은 이미 선산(善山)에 이르렀다. 저물녘에 개령(開寧)사람이 와서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리자 이일이 여러 사람들을 미혹시킨다고 하여 참(斬)하였다. 이일의 군사는 척후(斥候)가 없는데다가 백성들이 또한 감히 알리지 못했기 때문에 적병이 벌써 상주 남쪽 20리 되는 냇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도 알지 못하였다. 이일이 한창 상주 북쪽 냇가에서 습진(習陣)하고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고을의 성 안 몇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으므로 이일이 그제서야 군관 박정호(朴挺豪) 등을 시켜 가서 탐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이 이미 숲 사이에 잠복하여 있다가 즉시 총을 쏘아 죽이고는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갔다. 정호는 본래 용사(勇士)로 유명하여 군인(軍人)이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꺾일 정도의 인물이었다.
적이 마침내 크게 집결하여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일은 곧바로 말을 달려 도망하였으며 군사들은 모두 섬멸되었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호(朴箎)·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이 모두 죽었다. 이일은 군관 한 명, 노자(奴子) 한 명과 함께 맨몸으로 도망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입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3장 B면
【영인본】 25책 612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지난날 이일(李鎰)이 상주에 있을 때 적병들이 이미 가까이 접근하였는데도 우리 군중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접전하기 하루 전에 개령현(開寧縣) 사람이 와서 적이 온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으나, 이일(李鎰)은 군사를 미혹하게 한다고 해서 목을 베려고 하니, 그 사람은 죽음에 임하여 억울하다고 부르짖으며,
“청컨대 우선 나를 가두었다가 내일 아침까지 적이 오지 않으면 목을 베어도 늦지 않다.”
라고 하였으나, 이일이 듣지 않았다. 그날 밤에 적이 상주 남면(南面) 장천리(長川里)에 진군해서 주둔하니 상주성에서 겨우 20리 거리였다.
다음날 아침 적의 척후병 2, 3명이 무리를 지어 북쪽 개울 진지 앞까지 와서 한참동안 바라보고 여러 차례 왔다 갔으나, 우리 군중에서는 모두가 적의 척후병인 줄 알면서도 서로 경계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많은 적이 사방에서 운집하니, 이일의 군대는 모두 무너졌다."-서애집
상촌선생집 제56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지(志)
본국이 병화를 입은 기록[本國被兵志]
신묘년 3월에 세 명의 사신이 돌아왔다. 5월에 평의지(平義智)가 한 척의 배를 타고 와서 절영도(絶影島)에 정박한 뒤 스스로 말하기를 “급보가 있으니 경성에 가서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다.” 하였으나 본국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 경상 감사와 만나고 싶다고 하였으나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임진년 4월 14일 적군이 갑자기 들이닥쳐 먼저 부산(釜山)을 함락시켰다. 15일 적이 동래(東萊)로 진격해 왔는데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전사하고 성이 함락되었다. 좌수사(左水使) 박홍(朴泓)과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玨)이 연합하여 언양(彦陽)에 진을 쳤다가 얼마 뒤에 이각은 본진(本鎭)으로 돌아가고 박홍은 물러나 경주(慶州)에 주둔하였다. 16일 적이 흩어져 양산(梁山)ㆍ울산(蔚山) 등 지역에 들어와 대대적으로 노략질을 감행하였다. 17일 황산(黃山)의 잔교(棧橋)에 이르렀는데,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이 고군분투하였으나 당해내지 못해 적이 밀양에 들어왔다.
19일 관군이 와해되고 여러 고을이 잇따라 무너져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24일 적이 4개의 부대로 나뉘어졌는데, 한 부대는 낙동강(洛東江)을 따라 올라오고, 한 부대는 곧장 황간(黃澗)과 영동(永同)을 향하고, 한 부대는 조령(鳥嶺)을 향하였다. 25일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서 패하였다. 28일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서 전사하였는데, 29일 패보(敗報)가 이르자 30일에 선묘(宣廟)가 서쪽으로 길을 떠났다.
5월 2일에 적이 한강(漢江)에 이르렀는데 한강을 지키지 못해 3일 만에 적이 경성에 들어왔다. 7일 선묘가 평양(平壤)에 머물렀다. 27일 임진(臨津)의 수비벽이 무너지면서 6월 8일에 적의 선봉이 대동강(大同江)에 도착했다. 12일 선묘가 평양을 떠나 영변(寧邊)으로 갔는데, 이곳에서 양궁(兩宮 왕과 세자)이 처음으로 헤어져 선묘는 의주(義州)로 향하고, 광해(光海)는 감무(監撫)하는 임무를 받아 강원도 쪽으로 가서 이천(伊川)에 머무른 뒤 성천(成川)과 용강(龍岡) 등지로 옮겼다. 23일 선묘가 의주에 도착하여 행재소(行在所)를 차렸다.-상촌집
상촌선생집 제56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지(志)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諸將士難初陷敗志]
적병이 처음 부산에 이르렀을 때 망을 보던 관리가 대략 4백여 척쯤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적이 부산을 함락하고 잇따라 그 지역 일대의 진보(鎭堡)를 함락하자 여러 고을에서 멀리 바라만 보고 저절로 무너져 그 뒤로는 망을 보며 정탐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적의 대군이 후속 부대를 계속 보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바다를 덮으며 왔는데도 변장(邊將)이 이를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처음 보고해 온 것에 의거하여 늘 적의 병력은 단지 4백 척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우순찰사(右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은 말하기를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되지 않는데 한 척에 수십 명밖에 싣지 못하는 실정이고 보면 다 합해도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성일의 이러한 주장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도 그렇게만 여겼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출정할 때 단지 군관(軍官) 및 사수(射手) 60여 인을 이끌고 가면서 내려가는 도중에 군사 4천여 명을 거두워 모았다. 4월 24일 상주(尙州)에 도착했는데, 이일의 생각에 우리 군사가 오합지졸인 만큼 마땅히 습진(習陣)시켜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을 미처 반도 펼치기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별수없이 대진(對陣)하였으나, 교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를 쏘아대 철환(鐵丸)이 비오듯 쏟아졌으므로 아군이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적이 함성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자 우리 군사가 궤멸되면서 사상자가 무더기로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서 이일만 단기(單騎)로 몸을 빼어 달아나고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ㆍ박지(朴篪) 등은 모두 죽었다.
조정이 이일을 보낸 뒤 얼마 되지 않아 날로 급하게 변보(邊報)가 들어오기를 “적이 이미 내지(內地)로 쳐들어오고 있는데 장차 조령(鳥嶺)을 넘으려 한다.” 하자, 도성 인심이 어수선해지면서 피난갈 준비들을 하느라 부산하였다. 이에 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은 뒤, 더욱 도성 내의 무사와 재관(材官)을 동원하고 삼의사(三醫司 내의원(內醫院)ㆍ전의감(典醫監)ㆍ혜민서(惠民署)) 한량인(閑良人) 중에서 활을 쏠 줄 아는 자까지 뽑아 모두 그에게 소속시키는 한편,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각각 전마(戰馬) 1필씩을 내어 조력하게 하고, 무고(武庫)의 군기(軍器)를 꺼내 주어 그가 쓰게끔 하였다. 이때 징집된 제도(諸道)의 군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신립이 급히 내려가면서 단지 인근 고을의 군사만 이끌고 갔다.
4월 26일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는데 이 군사로 단월역(丹月驛)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때 이일을 만났는데
난중잡록 임진년 상上편의 상주전투 기록
"25일.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매, 이일(李鎰)이 대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날 새벽 안개가 자욱할 무렵 포성이 들려 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당도했음을 바로 알아채고 이일이 성 밖 북천(北川)에 나가 진을 치다.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다. 종사관 박지(朴篪), 이일의 종사관이다. 이경류(李慶流), 변 기(邊璣)의 종사관이다. 윤섬(尹暹)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살해되었고, 이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려 충주(忠州)로 돌아오다. 박지는 김수의 사위다. 그때 나이는 22세,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되었었다. 박지가 자기 군중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하여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박지는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함양(咸陽) 사람 인언룡(印彦龍)을 만나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받았건만 지금 전쟁이 불리해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용안(龍顔)을 뵙겠나.”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다."
위 기록으로 보아 계명산을 내려와 충주성을 갑자기 쳐먹은 왜倭의 대진大陣(사쿠에몬)은 기병이 주력임.
○ 경상 감사의 영리(營吏)인 이(李)란 사람이 전라감사에게 고목(告目)을 보내며 말하기를, “지금 도착한 소식통에 의하면 왜적들이 옷 안에 갑옷을 입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옷 밖에는 모두 갑옷을 입지 않고 병기인즉 단지 철환(鐵丸)을 쏘고 칼을 쓸 뿐입니다. 다른 재주는 없으나 다만 철환을 쏘지 않는 사람은 없고, 그 쏘는 것이 빗발치듯 하여 그 때문에 그들을 제압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고을의 군기고 외에 관사 같은 것은 태우지 않고, 읍내와 길가에서는 큰 집과 좋은 마을만을 골라서 불을 지릅니다. 중도(中道)의 왜적은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정도라서 그들은 동래(東萊)ㆍ양산(梁山)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대구(大丘)ㆍ인동(仁同) 및 선산(善山)을 거쳐 오며 다 태워 버렸습니다. 적들이 상주(尙州)에 이르렀을 때 순변사(巡邊使)가 그들과 접전하였지만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패배당했습니다. 왜적의 무리는 상주와 함창(咸昌)도 태우고 이미 조령(鳥嶺)에 이르렀고 불일간 조령을 넘어갈 기세까지 있다고 합니다만,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고대일록
임진(壬辰, 1592) 원문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임진(壬辰, 1592)
4월
○ 만력(萬曆) 임진(壬辰, 1592) 4월 20일
왜적(倭賊)이 상륙(上陸)했다. 일기(日記) 가운데 십여 장이 모두 떨어져 나가 첫 부분은 살펴볼 수가 없다.
○ 4월 23일 임자(壬子)
김산(金山)의 적들이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황간현(黃澗縣)으로 치달렸다. …〈결(缺)〉… 적들은 나누어 상주(尙州)로 향하기 위해 성(城)에 들어가 머물고 있었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의 북천(北川)에서 적들과 전투를 벌였지만, 관군(官軍)이 불리했다. 적들이 조령(鳥嶺)을 넘어 상주로 향하였는데, 이후로 거쳐 가는 주현(州縣)마다 적의 무리로 가득하여 강좌(江左)의 소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했다. 연변(沿邊)의 군현(郡縣)들도 연락이 단절되어, 대부분 왜놈〔倭奴〕의 소굴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이 다양한 방략(方略)으로 힘을 다해 방어했다. 적이 세 차례나 성 아래까지 도달했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을 보이지 않은 채,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며 방어의 계책을 마련하는 늠름한 모습이 마치 파도가 밀려와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지주(砥柱)와 같았다. 만약 군대를 이끄는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준민(俊民)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면, 어찌 이토록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경우가 있었겠는가. 준민은 경성(京城) 사람이다. ○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은 사망한 절도사(節度使) 준량(俊良)의 아들로 평소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변란이 발발한 초기부터 전함에 올라 적을 방어하며 하루도 육지에 발을 내린 적이 없었다.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 [우상(右相) 유성룡(柳成龍)이 천거하였다.] 과 한마음이 되기를 약속하고는 전력을 다해 적을 추격해 격파했다. 적들이 더 이상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된 것은 양 수사(兩水使)의 공로이다.
김해(金澥) : 1534~159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사회(士晦). 호는 운송(雲松). 1592년 상주 목사로 재임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당황한 나머지, 순변사 이일(李鎰)을 맞이한다는 핑계로 성을 떠나 피신하였다. 그러나 뒤에 판관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개령(開寧)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상주성을 일시 탈환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왜적에게 포위되어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바야흐로 임진년 4월 17일에 변방의 보고가 서울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이일(李鎰)을 보냈습니다. 이일이 문경에 이르니 문경이 이미 비었고, 상주에 이르니 상주도 벌써 비어 있었습니다. 흩어진 군사를 모은 것이 겨우 수백 명인데, 대오를 미쳐 나누지도 못한 사이에 적은 이미 낙동강을 건너 상주 10리 밖에 이르렀습니다."-서애선생문집 제7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계사(啓辭) 진관(鎭管) 제도를 재정비하여 거행할 것을 청하는 계 3월
"이일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巡邊使)로서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지켰습니다. 적이 정탐하여 방비가 없음을 알고 밤새 재를 넘어 곧바로 나아가 성을 에워쌌습니다.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게 되자, 우리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금탄(金灘)에 빠지니,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충주는 경도(京都)의 상류에 있으니 충주를 이미 잃었으면 경성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경도 사람들은 이일·신립이 다 중병(重兵)으로 험애(險隘)를 막고 있었으므로 날마다 승전의 소식을 기다렸는데 패하였다는 보고가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또 성안의 정장(精壯)도 먼저 신립·이일과 여러 장관(將官)들이 뽑아 데려 갔고, 제도(諸道)의 원병도 미처 불러 모으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임금은 사세가 이미 급박해진 것을 알고 왕자(王子)와 재신(宰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사방에서 불러 모으게 하고, 자신은 서방으로 옮아가 상국(上國) 지방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정성을 바쳐 천자의 뜰에서 은혜를 빌어 회복을 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나라를 지키는 떳떳한 도리는 아닐지라도 또한 일을 헤아리는 권의(權宜)인데, 과연 천자의 생성(生成)하는 은혜를 입어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적변이 생긴 이래의 대체적인 사정입니다."-선조 4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윤11월 14일(갑오) 2번째기사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 유성룡을 인견하고 중국 사신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다
"....음력 4월 24일 상주라는 성채의 전방에 있는 산 위에 조선의 서울로부터 온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는 대략 2만명으로 그들 사이에는 고위 지휘관으로 3명의 귀족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주 단시간 내에 그들을 패주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들의 총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 이상을 무찔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나머지 적병은 울창한 숲 속으로 도주하였으므로 전부 소탕하여 전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데요시의 편지
[출처] [운지절 한국사] 8만명이 운지한 탄금대 전투 ㅠㅠ 아 쓰벌 슬프다 ㅠㅠ
[링크] http://www.ilbe.com/1272017554
고니시 일본군이 상주에 도착할 그 때...! 상주에는 신립의 부하인 이일의 2만 군대가 와있었다.
이일의 2만군은 고니시 일본군을 섬멸하기위한 것이 아닌 거짓으로 패하고 달아나는 군대였다.
즉 고니시의 일본군이 얼마나 맛있는 감자인가 찔러보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거짓으로 패하고 빠르게 숲속으로 도주하자 일본군들은 상주 이일군을 잡지못했다. 이 과정에서 1000명이 죽거나 잡혔다.
이 때 이일은 신립이 미리 지시한대로 일본어를 말할 수 있는 역관 경응순을 남겨두었다.
경응순이.gif
"이 전투에서 많은 적병을 포로로 잡았습니다만, 그 가운데에는 일본어를 말하는 한 역관(경응순)이 있었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히데요시에게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의 편지
돌격.jpg
"그(경응순)는 조선의 국왕에게서 다음과 같은 전갈을 저에게 전하기 위해서 파견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 국왕은 정세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경우, 전하의 곁에 국왕을 대신할 인질을
보낼 것이고, 일본군의 중국 원정에 즈음해서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선두에 서서 길 안내 역할을 하며
도와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히데요시에게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의 편지
고니시유키나가.jpg
"전하(히데요시)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셨지않습니까. '만약 조선 국왕이 용서를 빌면 용서하여도 좋다'라고...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제(고니시 유키나가)가 몇 가지 이쪽의 요구 조건을 붙여서 앞서의 역관을 국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히데요시에게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의 편지
경응순의약속.jpg
"이 역관은 저에게 말하기를 2,3일 안에 매우 중요한 두 세 사람의 인물과 함께
회답을 가지고 돌아와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낼 테니까 기다려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히데요시에게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의 편지
으음.jpg
고니시히히히히.jpg
"저는 군대와 함께 조선의 서울에 접근해가고 있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히데요시에게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의 편지
역관 경응순은 신립이 지시해준대로 고니시 유키나가를 만나 "조선의 국왕은 항복을 하고싶습니다. 탄금대에서 항복 조인식을
갖겠습니다."라고 말하게하여 고니시 일본군을 탄금대로 유인한다.
쉽게 말해 떡밥을 뿌린 것이다.
이 때 경응순은 "그러니까 기다려달라"라고 말한다.
기달려달라하면 기다려주겠는가? 고니시 일본군은 더 빠르게 진격한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신립이 더 바라는 일.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는 떡밥을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조선의 지형을 낱낱이 조사한 일본군은 탄금대가 들판과 늪지가 있고
뒤론 강이 있다는걸 알고있었을 것이고 조선군이 미쳤다고 여기에 있겠나하고 생각하며 진군...
즉 별 다른 의심을 하지않은 것 같다.
[출처] [운지절 한국사] 8만명이 운지한 탄금대 전투 ㅠㅠ 아 쓰벌 슬프다 ㅠㅠ
[링크] http://www.ilbe.com/1272017554
● 1592년 4월 25일(일본력으론 4월 24일) - 상주 성채 전방의 이일의 2만군이 고니시와 싸운 후 거짓으로 패한척하고 달아나 숲으로 들어가 고니시가 못잡다.
이일의 2만 대군은 충주의 신립의 6만 대군과 합쳐 총 8만 대군이 되었다.
이일이 남겨둔 일본어에 능한 역관 경응순이 고니시에게 도착.
조선 사신 경응순이 일본군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와서 이렇게 말한다.
"아 우리 조선 국왕이 ㅎㄷㄷ하며 일본 성님들께 항복하고 명나라 치러 가는 길 빌려줄테니까
4월 28일에 탄금대에서 항복식 가지겠습니다. 이덕형 쨩이 조선 국왕의 항복서를 가지고 4월 28일에
탄금대로 올것이니께 4월 28일에 탄금대로 오십시오 ㅠㅠ"라고 함.
고니시는 '알았다'라고 말하고 경응순을 조선 국왕에게 돌려보내다.
* 서정일기에 따르면, 일본군은 4월 24일 상주에서 싸웠다. 4월 24일은 일본력에 의거한 날짜다.
한국 날짜로는 4월 25일이다.
"이 전투에서 많은 적병을 포로로 잡았습니다만, 그 가운데에는 일본어를 말하는 한 역관(경응순)이 있었습니다.
그(경응순)는 조선의 국왕에게서 다음과 같은 전갈을 저에게 전하기 위해서 파견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 국왕은 정세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경우, 전하의 곁에 국왕을 대신할 인질을
보낼 것이고, 일본군의 중국 원정에 즈음해서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선두에 서서 길 안내 역할을 하며
도와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전하(히데요시)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셨지않습니까. '만약 조선 국왕이 용서를 빌면 용서하여도 좋다'라고...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제(고니시 유키나가)가 몇 가지 이쪽의 요구 조건을 붙여서 앞서의 역관을 국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 역관은 저에게 말하기를 2,3일 안에 매우 중요한 두 세 사람의 인물과 함께
회답을 가지고 돌아와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낼 테니까 기다려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히데요시에게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의 편지
"상주의 패전에서 왜역관(倭譯官) 경응순(景應舜)이 진중에 있다가 잡혔는데,
평행장(平行長)이 수길(秀吉)의 서계(書契)와 예조에 보내는 공문을 응순에게 주어 내보내면서 말하기를,
“동래(東萊)에 있을 때에 울산 군수(蔚山郡守)를 생포하여 서계를 전하여 보냈는데 지금까지 회보가 없다.
【군수 이언성(李彦誠)이 적중에서 돌아와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자신이 도망쳐 왔다고 말하고 그 서계는 숨긴 채 전달하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는 알지 못했다.】조선(朝鮮)이 강화(講和)할 의사가 있으면 이덕형으로 하여금 28일에 충주(忠州)에서 나를 만나도록 하라.”-선조수정실록
● 1592년 4월 25일(일본력으론 4월 24일) - 조선 사신 경응순이 간 후 즉각 고니시가 히데요시에게 편지를 써
조선 국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서울을 파괴하지말아야한다고 건의하다.
"삼가 전하에게 본 서장을 올립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 1592년 4월 26일(일본력 4월 25일) - 고니시가 4월 26일 문경새재에 도착. 이 때 문경새재는 텅텅 비어있었다.
"음력으로 25일에 문경이라는 이름의 한 성에 도착하였습니다만 이곳은 텅 비어 있어서 바로 7리 떨어져 있는 충주라는
다른 성채로 향했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당초 적병은 두 재[嶺]의 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당도하자 산길은 고요하고 사람의 발자취도 전연 없는지라
마침내 크게 기뻐하여 날뛰었다."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
"왜군이 문경새재를 지키는 군사가 있을까 두려워서 사람을 시켜 2번,3번 탐지해본 뒤에야 지키는 군사가 없는 것을
알고는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지나갔다." -유성룡의 징비록
● 1592년 4월 26일(일본력 4월 25일) - 고니시가 즉시 자신의 군대 1만 8천 700을 3부대로 나누고
2부대를 먼저 은밀히 출정시키다.
2부대는 은밀히 문경을 떠나 충주로 향하였는데.
우군 소 요시토시(종의지) 5000, 좌군 마쓰라 시게노부 4000이다. 고니시 사쿠에몬의 노다치 사무라이 부대도
포함되어있다.
==
"음력으로 25일에 문경이라는 이름의 한 성에 도착하였습니다만 이곳은 텅 비어 있어서 바로 7리 떨어져 있는
충주라는 다른 성채로 향했습니다.... 아고스띠뇨(고니시)는 문경이라 불리는 곳을 출발하여 충주라는
다른 지역으로 향하였는데,그곳에서 항복에 관한 조선 국왕의 회답을 가지고 서울에서 마중 오는 사람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아고스띠뇨는 그의 군대를 3부대로 나누었는데"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적은 벌써 은밀히 재를 넘어" -연려실기술
● 1592년 4월 26일 - "신립이 충주에 당도한 4월 26일에 적은 이미 새재[鳥嶺]를 넘었다." -연려실기술
"신립이 새재[鳥嶺]를 막고 방어하려다가 길이 험해서 말달리고 활쏘기 불편하다고 물러와 충주에 진을 쳤다." -연려실기술
(궁기병 운용의 증거)
● 1592년 4월 27일(일본력 4월 26일) - 고니시가 문경을 점령했다.
* 서정일기엔 4월 26일에 문경을 점령했다고 적혀있다. 이건 일본력 날짜이다. 한국력 날짜론 4월 27일이다.
기재사초
○ 27일 생원 구용(具容)과 권필(權韠)이 상소하기를,
“유성룡(柳成龍)의 강화 주장과 이산해(李山海)의 나라 그르침은 실로 오늘날의 진회(秦檜)와 양국충(楊國忠)이오니, 참수하여 백성에게 사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 이일(李鎰)이 상주에 도착하여 미처 진(陣)을 펴기도 전에 전군이 모두 패망하였다. 이날 보고를 접하자 거리가 텅 비어서 성을 지키려 하여도 이미 지킬 사람이 없었다.
○ 적이 밀양에 도착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덕형(李德馨)을 만나기를 원한다 말하므로 마침내 그를 보냈다.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임진잡사(壬辰雜事)
시민이 도성의 안팎 산에 모여 술과 풍악을 갖추어 저물도록 노래하고 춤추다 돌아가는 것이 봄과 가을에 성행하였다. 경인ㆍ신묘 연간에 서울에서 떠도는 말에, 오래지 않아서 세상이 바뀔 터이니, 살아 있을 동안 실컷 먹고 마시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면서 서로 다투어 놀이를 일삼아, 어떤 사람은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것을 식자들은 상서롭지 못하게 여겼다.
○ 임진년(1592, 선조 25) 4월 13일에 푸른 무지개가 궁중의 우물에서 일어나 상에게로 다가왔다. 상이 이것을 두세 번 피하였지만 곧 따라오므로 문을 닫으니 비로소 멎었다. 이날 왜적이 부산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매우 두려워하여 피난할 계책을 세웠다. 이상은 서현기(徐玄紀)가 말한 것이다. 서(徐)의 이름은 성(渻)
임진년 4월에 이일(李鎰)이 충주에 이르러, 적의 형세가 대단하다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상은 이 보고를 보고 매우 두려워했다. 하루는 새가 궁중에 날아와 처마 위에서 밤낮을 그치지 않고 울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절해서 마치 사람을 향해 슬피 부르짖으며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는 듯 하였다. 원근에서 이 소리를 듣고 마음이 크게 무너져 내렸다. 상도 괴상하게 여기고 드디어 서도(西道)로 피난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새의 모양은 뻐꾸기 같은데 작고, 꼬리도 짧았다. 사람들이 일찍이 보지 못한 것으로 어떤 사람은 금강산에 이 새가 있다 하였다. 이 새가 그믐날이 되어서야 어디론지 날아 갔으니, 이 역시 괴이쩍은 일이다.
○ 이자정(李子政)이 말하기를,
“임진년에 한가로이 성문 밖에 살았기로, 일찍이 상이 서울을 떠나려는 뜻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 사람이 혹 이런 말을 하면, 곧 그럴 이치가 없다고 대답했다. 하루는 새벽에 남녀가 물밀 듯 쏟아져 나와 길을 메우더니, 이윽고 임금의 행차가 북도로 향했다고 들었다. 이자정은 당황하여 말을 타고 양주(楊州)로 따라 가 길가는 사람에게 두루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기에 돌아왔다.”
하였다. 나는 병조의 낭관으로 밤낮 마영(馬營)에 있었는데, 충주가 무너지게 되자 사람과 말이 궁 안에 뒤섞여 들어오고 상하가 부르짖으며 통곡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는 드디어 여러 동료와 같이 외병조(外兵曹)에 나가 있으면서 길 떠날 준비를 하는데, 어떤 아전이 와서 전하기를,
“상은 선인문(宣人門)으로 벌써 나가셨다.”
하였다. 우리들이 허둥지둥 대궐에 들어갔더니, 거짓말이었다. 나는 대궐 바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잘못된 전달을 받았는데, 이자정이 따라간 것이 어찌 괴이하랴. 기자헌(奇自獻)의 말에는,
“임금의 뒤를 쫓아 안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달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하니, 근사치도 않는 말이다. 이(李)의 이름은 정립(廷立)이고, 기(奇)의 이름은 자헌(自獻)이다.
서현기(徐玄紀)는 성질이 굳세어 사람 배척하기를 잘하였다. 임진년 4월에 조정에는 임금의 서행(西行)을 그만 두기를 청하는 상소가 많았다. 어느 날 나는 여러 동료에게 말하기를,
“우리들도 본 병조에 있는데 우리만 서울 떠나는 것이 그르다고 말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니, 유보(裕甫)가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내가 상소문의 뜻을 일어 줄 터이니, 그대는 이것을 쓰시오.”
하였다. 그 글에,
“산천의 형승으로 말해도 한양보다 나은 데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하옵니까? 성과 호(壕)가 험준함도 한양보다 나은데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하옵니까? 인구가 많고 축적이 많음을 전하께서는 홀로 생각지 않으십니까? 종묘가 여기에 있고 사직이 여기에 있으며, 또 왕릉이 여기에 있사온데, 전하께서는 차마 떠나실 수 있사옵니까? 서행(西行)하시려는 뜻은 이미 내정해 놓고 경향에다 방을 붙여 설유하기는, ‘마땅히 사수(死守)한다.’ 일렀으니, 전하께서 비록 백성을 속이실지라도 조종의 신령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조종도 속일 수 없는데, 하물며 하늘을 속이겠나이까?”하였다. 글귀는 많지 않지만 뜻이 잘 반영되어 읽어갈수록 간절하였으니, 한때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상소문이 완성되자, 유보가 말하기를,
“대의가 관계되는 바라서 어쩔 수 없이 이같이 하였으나, 한편으로 말하면 군부(君父)를 포위된 성에 계시게 하는 것도 신자(臣子)로서 차마 할 일이 못된다.”
하니, 서현기가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이 같다면 맹자도 또한 불충(不忠)이오.”
하였다. 이 날 저녁에 유보는 사사로이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나아가 속히 난을 피하기를 청하고, 그믐날 또 이같이 하였다. 이에 서현기가 분개하며 말하기를,
“이홍로는 하나의 외인(外人)으로 감히 이와 같이 하니, 우리들도 차비문 밖에서 극력 간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기재사초 하(寄齋史草下)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임진잡사(壬辰雜事)
시민이 도성의 안팎 산에 모여 술과 풍악을 갖추어 저물도록 노래하고 춤추다 돌아가는 것이 봄과 가을에 성행하였다. 경인ㆍ신묘 연간에 서울에서 떠도는 말에, 오래지 않아서 세상이 바뀔 터이니, 살아 있을 동안 실컷 먹고 마시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면서 서로 다투어 놀이를 일삼아, 어떤 사람은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것을 식자들은 상서롭지 못하게 여겼다.
○ 임진년(1592, 선조 25) 4월 13일에 푸른 무지개가 궁중의 우물에서 일어나 상에게로 다가왔다. 상이 이것을 두세 번 피하였지만 곧 따라오므로 문을 닫으니 비로소 멎었다. 이날 왜적이 부산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매우 두려워하여 피난할 계책을 세웠다. 이상은 서현기(徐玄紀)가 말한 것이다. 서(徐)의 이름은 성(渻)
임진년 4월에 이일(李鎰)이 충주에 이르러, 적의 형세가 대단하다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상은 이 보고를 보고 매우 두려워했다. 하루는 새가 궁중에 날아와 처마 위에서 밤낮을 그치지 않고 울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절해서 마치 사람을 향해 슬피 부르짖으며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는 듯 하였다. 원근에서 이 소리를 듣고 마음이 크게 무너져 내렸다. 상도 괴상하게 여기고 드디어 서도(西道)로 피난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새의 모양은 뻐꾸기 같은데 작고, 꼬리도 짧았다. 사람들이 일찍이 보지 못한 것으로 어떤 사람은 금강산에 이 새가 있다 하였다. 이 새가 그믐날이 되어서야 어디론지 날아 갔으니, 이 역시 괴이쩍은 일이다.
○ 이자정(李子政)이 말하기를,
“임진년에 한가로이 성문 밖에 살았기로, 일찍이 상이 서울을 떠나려는 뜻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 사람이 혹 이런 말을 하면, 곧 그럴 이치가 없다고 대답했다. 하루는 새벽에 남녀가 물밀 듯 쏟아져 나와 길을 메우더니, 이윽고 임금의 행차가 북도로 향했다고 들었다. 이자정은 당황하여 말을 타고 양주(楊州)로 따라 가 길가는 사람에게 두루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기에 돌아왔다.”
하였다. 나는 병조의 낭관으로 밤낮 마영(馬營)에 있었는데, 충주가 무너지게 되자 사람과 말이 궁 안에 뒤섞여 들어오고 상하가 부르짖으며 통곡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는 드디어 여러 동료와 같이 외병조(外兵曹)에 나가 있으면서 길 떠날 준비를 하는데, 어떤 아전이 와서 전하기를,
“상은 선인문(宣人門)으로 벌써 나가셨다.”
하였다. 우리들이 허둥지둥 대궐에 들어갔더니, 거짓말이었다. 나는 대궐 바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잘못된 전달을 받았는데, 이자정이 따라간 것이 어찌 괴이하랴. 기자헌(奇自獻)의 말에는,
“임금의 뒤를 쫓아 안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달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하니, 근사치도 않는 말이다. 이(李)의 이름은 정립(廷立)이고, 기(奇)의 이름은 자헌(自獻)이다.
서현기(徐玄紀)는 성질이 굳세어 사람 배척하기를 잘하였다. 임진년 4월에 조정에는 임금의 서행(西行)을 그만 두기를 청하는 상소가 많았다. 어느 날 나는 여러 동료에게 말하기를,
“우리들도 본 병조에 있는데 우리만 서울 떠나는 것이 그르다고 말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니, 유보(裕甫)가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내가 상소문의 뜻을 일어 줄 터이니, 그대는 이것을 쓰시오.”
하였다. 그 글에,
“산천의 형승으로 말해도 한양보다 나은 데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하옵니까? 성과 호(壕)가 험준함도 한양보다 나은데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하옵니까? 인구가 많고 축적이 많음을 전하께서는 홀로 생각지 않으십니까? 종묘가 여기에 있고 사직이 여기에 있으며, 또 왕릉이 여기에 있사온데, 전하께서는 차마 떠나실 수 있사옵니까? 서행(西行)하시려는 뜻은 이미 내정해 놓고 경향에다 방을 붙여 설유하기는, ‘마땅히 사수(死守)한다.’ 일렀으니, 전하께서 비록 백성을 속이실지라도 조종의 신령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조종도 속일 수 없는데, 하물며 하늘을 속이겠나이까?”하였다. 글귀는 많지 않지만 뜻이 잘 반영되어 읽어갈수록 간절하였으니, 한때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상소문이 완성되자, 유보가 말하기를,
“대의가 관계되는 바라서 어쩔 수 없이 이같이 하였으나, 한편으로 말하면 군부(君父)를 포위된 성에 계시게 하는 것도 신자(臣子)로서 차마 할 일이 못된다.”
하니, 서현기가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이 같다면 맹자도 또한 불충(不忠)이오.”
하였다. 이 날 저녁에 유보는 사사로이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나아가 속히 난을 피하기를 청하고, 그믐날 또 이같이 하였다. 이에 서현기가 분개하며 말하기를,
“이홍로는 하나의 외인(外人)으로 감히 이와 같이 하니, 우리들도 차비문 밖에서 극력 간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유보는 이홍로의 자(字)이다. 이자상(李子常)이 말하기를,
“대가를 따라 임진강에 이르러 어떤 여아를 만났는데 나이 열 너댓 살쯤 되어 보였다. 이 여아는 비 속에 길을 잃고 혼자 가다가 강을 건너가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는데, 얼굴이 범상하지 않았다. 곧 배를 타라 하여 건너 주니, 그 여아는 정면으로 고맙다고 사례를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가지 않는 것이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는 듯하였다. 나는 그 여아가 동행할 뜻이 있어 그러는 줄을 알았지만 데리고 가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한이 된다.”
하였다. 자상은 이항복(李恒福)이다.
○ 왜변이 난 처음에 상이 임진강에 도착하니, 민빈(閔嬪)이 가마에 다쳐 날이 어두워서야 도착했다. 배가 서쪽 언덕에 닿으니, 군인이 사방으로 흩어져가고, 하늘에서 또 비가 와 갈 곳을 몰랐다.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급히 병조 낭관과 같이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좋겠다.”하니, 이항복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외쳤다. 내가 사형(士瑩)과 함께 어떤 배에 가서 불렀더니, 10여 인이 나오므로 데리고 오니, 상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어 어좌(御座)를 보니 오직 유서애(柳西厓)만이 들어와 임금 앞에 엎드려 있었고, 좌우에는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가 엎어져서 잠을 자고 있었다. 상은 여전히 채찍을 들고 앉아 있었는데, 당시 궁색한 행색 중에 이 날이 제일 심하였다. 사형은 이영(李覮)이고, 서애(西厓)는 유성룡이다.
○ 임진강에 당도한 그날 저녁에 상하가 질서없이 강을 건너느라 인마를 많이 잃었다. 나는 사형과 약속하기를,
“그대가 말을 얻으면 나를 불러 같이 타고, 내가 말을 얻어도 그대와 함께 타겠소.”
하고, 진흙 속을 맨발로 가다가, 어떤 때는 무릎까지 빠져서 넘어지기도 했다. 어둡기가 칠흑 같아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는데,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이 있기에 누군가 물었더니, 바로 유보(裕甫 이홍로)였다. 유보가 말하기를,
“내가 먼저 가서 밥을 지어 놓고 기다릴 테니, 그대들 두 사람은 잘 살펴 오시오.”
하였다. 조금 후에 병랑(兵郞)을 부르는 자가 있었다. 내가 사형에게 말하기를,
“내가 매우 걸음이 빠르니, 그대는 여기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오.”
하니, 알았다고 하였다. 나는 상의 앞으로 쫓아가 횃불 하나를 얻어 들고 어마(御馬)를 수행하여 오니, 밤이 이미 깊어서, 또 사형을 만나지 못했다. 10리를 채 못가서 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급히 대답하기를,
“말을 얻어 그대를 기다려도 오래도록 오지 않아서 이미 가버렸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약속을 어기게 될까봐 감히 가지도 못하였소.”
하였다. 그제서야 둘이 함께 말을 타고 갔다. 유보는 찾지 못하였는데, 다음날 유보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왜 오지 않았는가?”
하였다.
정경진(鄭景眞)이 동파(東坡)에 이르러, 부제학에서 뛰어올라 예조 판서를 제수받고 나서 말하기를,
“나이가 젊은데 갑자기 승급되어 여기에 이르니, 나는 죽을 것입니다.”
하고, 소를 만들어 면직을 빌고자 하였는데, 홍군서(洪君瑞)가 말리며 말하기를,
“나라는 깨어지고 집은 망하고, 지존은 몽진(蒙塵) 길을 떠났으니, 우리들의 생사가 조석에 달렸소. 어찌 유독 갑자기 승진된 것 때문에 죽는다 하오.”
하니, 드디어 면직을 청하지 않았다. 정(鄭)의 이름은 창연(昌衍)이고, 홍(洪)의 이름은 인상(麟祥)인데, 뒤에 이상(履祥)으로 고쳤다.
대가가 개성부(開城府)에 머물렀다. 어느 날 대소의 종신(從臣)들이 함께 한 문 안에 있었는데, 구원유(具元裕)가 문득 내소문(內小門)으로부터 몸을 구부리고 나왔다. 그리고 급히 부르며 말하기를,
“상께서 삼사(三司)는 입시하라 하시오.”
하니, 어떤 사람은 명을 듣지 못했다 하여 머뭇거리며 감히 들어가지 않았다. 구원유는 드디어 대사간 김숙진(金叔珍)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하기를,
“내가 친히 전교를 받들었는데, 어찌 감히 들어가지 않는가?”
하니, 마침내 모두 일어났다. 이공보(李公輔)도 헌납으로서 홍사신(洪士信)의 곁에 있다가 또한 일어나려 하니, 홍사신이 옷을 잡아 않히며 말하기를,
“누가 명을 전달했다고 자네들이 바로 입시하려 하는가?”
하였다. 대개 그들이 아계(鵝溪)를 논죄하기 위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입시하자, 여러 사람이 아계옹(鵝溪翁)이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를 공격하였다. 또 구원유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황붕(黃鵬)은 산해의 조카인데, 그대가 어찌 감히 여기에 함께 참여했는가?”
하였는데, 난잡하여 질서가 없고 말들이 시끄러워 입시하는 때 같지 않았다. 구원유의 이런 행동은 내통했다는 말을 빌어서 아계에게 죄를 입히자는 것이었지만 친히 전교를 받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구의 이름은 성(宬), 김의 이름은 찬(瓚), 이의 이름은 정신(廷臣), 홍의 이름은 여순(汝諄). 아계는 이산해이다.
○ 심 공망(沈公望)은 언사가 자못 강개하였다. 상이 송경(松京)에 도착하여 호남ㆍ영남 지방에서 징병하고자 하였으나 보낼 사람이 없었다. 심공망이 자청하여 아뢰기를,
“이런 시기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사오니, 신이 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위로하여 보냈다. 물러 나와서 오음(梧陰)에게 말하기를,
“공은 지금 재상입니다. 공변된 마음을 펴고 사사로운 정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하였다. 심의 이름은 대(岱), 오음(梧陰)은 윤두수이다.
○ 정경진이 사당의 신주를 묻자고 의논하던 날, 신백준(申伯俊)은 상의 어찰(御札)을 받아 서울로 향하여 남아 있는 백성을 위유하려 하였다. 그가 마산(馬山)에 이르러서, 적이 벌써 도성을 점령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는 겁이 나서 곧장 돌아왔다. 상이 개성을 출발하니, 행색이 황급하여 두서가 없었다. 보산(寶山)에 이르니, 종실 해풍(海豐)이 와서 오음에게 말하기를,
“어찌 종묘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공은 알지 못하는가?”
하니, 오음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아무 날이 내가 재상이 된 날인데, 내가 재상이 되어 나라가 망했소.”
하고, 탄식하며 울었다. 신(申)의 이름은 잡(磼)이다.
거가(車駕)가 지나는 곳마다 아랫 사람들이 저지르는 행폐가 평상시보다 갑절이나 되었는데, 환관의 종들이 백관의 종들에 비하여 더욱 심했다. 금암(金岩)에 도착하던 날에는 떡과 반찬을 빼앗으려고 어소(御所)에까지 함부로 들어왔다. 선전관이나 여러 무관도 모두 금하지 못하였고, 상에게 드리는 물건도 빼앗기게 되었다. 신계 현령(新溪縣令) 정윤지(丁胤祉)는 거짓으로 땅에 쓰러졌다가 눈을 뜨고 똑바로 보면서 마치 기절한 사람같이 하였다. 그리고는 하인에게 돌아다니며 소리쳐, ‘아무 현령이 살해를 당했소.’라고 말하게 하였다. 상이 크게 놀라 급히 그를 움켜잡은 자를 체포하여 베이게 하니, 드디어 어찬(御饌)을 뺏긴 책임을 모면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란 꾀가 있어야 한다. 오늘의 난동은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막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였다.
상이 개성에서 유기성(兪杞城)ㆍ이오성(李鰲城)에게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를 모시고 먼저 평양으로 가도록 명하였다. 또 글을 내려 정인성(鄭寅城)을 불러서 왕자를 보호케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내 평소에 경의 충절(忠節)이 대사를 부탁할 만한 줄 알고 있소.”
하였다. 글이 강계에 도착하자, 정인성이 곧 길을 떠나려 하니, 부사 홍세공(洪世恭)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비록 내리신 교서는 있지만 의금부의 공문이 오지 아니하였으니, 가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다가 상이 평양에 왔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홍세공을 대단하게 여기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난리 때에는 일을 마땅히 조심하고 치밀히 하여야 하는데, 이 사람은 강직하여 취할 만하다.”
하였는데, 내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하서(下書)는 임금의 말이요, 공문은 작은 일이다. 대가가 송경에 도착하여 일이 갑작스러운 것이 많아 군신의 예절도 다하지 못하는 판국인데, 의금부의 공문을 어디로 보내겠는가. 망령된 행위라 한다면 괜찮지만 강직하다 하는 것은 내가 모를 말이다.”
하였다. 유기성(兪杞城)이 정승이 되고 나서 도체찰사를 겸직하였다. 행장을 꾸리고 떠나려고 할 때 내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그 집에 갔더니 목공(木工) 네 사람이 마침 뜰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허공언(許功彦)ㆍ이징원(李澄源)이 종이와 붓을 잡고 좌우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허와 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나무 깎는 것은 가마[馬轎]를 만들려는 것이요, 종이와 붓은 격문을 기초하려는 것인데, 기성 또한 격문 내용을 스스로 구상하고 있다.”
하였다. 대체로 세 사람이 각각 기초하여 그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여 쓰자는 것이다. 내가 돌아가서 윤해평(尹海平)에게 말하니, 해원(海原)이 곁에 있다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 애는 오활(迀闊)하여 쓸 수가 없다.”
하였다. 허의 이름은 성(宬), 이의 이름은 유징(幼澄), 해평은 윤근수(尹根壽), 해원은 오음이다.
신립(申砬)이 패한 뒤에 거가(車駕)가 그날로 한성(漢城)을 출발하였다. 신립이 패전한 곡절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또 생사도 알지 못한다. 혹은 그가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하고, 혹은 남중(南中)으로 내려가 다시 거사를 도모한다 하고, 혹은 방금 해서(海西 황해도)에 이르러서도 죄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루는 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함께 계획할 일을 의논하는데, 근심스러운 안색으로 이르기를,
“적의 기세는 과연 당하기 어렵구나.”
하였다. 이원부(李元夫)가 도승지로서 일어나 어전에 엎드려 얼굴을 들고 소리를 높여 아뢰기를,
“상감께서는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신이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들으니 신립은 과연 죽지 않고 해서에 있다고 합니다. 불러 쓰시면, 왜적은 근심거리가 못됩니다.”
하니, 상은 허망한 말이라 생각하면서 비웃으며 이르기를,
“지금 장수감이 없는데, 도승지 같은 사람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원부가 또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신은 진실로 착착(着着 사투리 말이다)하여 장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였다. 이의 이름은 충언(忠言)이다.
감사 권징(權徵)이 임진(臨津) 군중에 있으면서 치제하기를,
“마전 군수(麻田郡守) 박치홍(朴致弘)이 처음에는 벼슬을 버리고 관동(關東)으로 피했다고 하나, 실은 잘못 전해진 말을 듣고 그렇게 한 것이니, 중한 죄를 줄 필요가 없을 듯하옵니다. 또 이제 그 아버지를 위하여 호조 판서 박충간(朴忠侃)의 종사관이 되어 방금 행장을 꾸리고 있으니, 백의종사(白衣從事)의 형률로써 속죄하게 해 주시기 청합니다.”
하며, 많은 말을 반복하였는데 모두 박치홍을 구해 주려는 것이었다. 해원(海原)이 보고서 낯을 찌푸리며 말하기를,
“큰 도적이 경내에 들어 왔고 고군(孤軍)이 처음으로 모였는데, 자신이 경기 감사로 있으면서 할 일이 그리 없어 이런 일에만 급급(汲汲)합니까. 박치홍이 죄를 면하는 것이 과연 경기 감사에게 관계되는 일입니까? 이 분이 허둥지둥하는 것을 보니, 반드시 실성한 것입니다.”
하니, 내가 말하기를,
“권 감사는 침착하여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니, 허둥지둥하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해원이 말하기를,
“그대는 권징을 구원하고자 하는가?”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만일 침착하여 서두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장계가 어찌 이토록 자세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온 좌중이 모두 웃으며 아주 좋다고 거듭 말하였다.
○ 송강(松江)이 서애에게 말하기를,
“내가 강계에 있을 때에 애들이 서울에서 글을 보내기를, ‘오늘의 의론은 서애가 대단히 준엄하여 기어이 사지(死地)에 몰아 넣으려 한다 합니다.’ 하였기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였소. 뒤미처 또 글을 보내기를, ‘지난 번에 알린 말은 잘못 전했습니다. 구해준 분은 서애입니다.’ 하므로, 내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소. 이 말이 공의 뜻에는 어떠하시오.”
하니, 서애는 옳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인성(寅城)에게서 들었다. 송강은 곧 인성의 호이다.
기성(箕城)의 비변사 뒤에 방 한 개가 있었는데, 여러 재상이 그곳에 가서 쉬었다. 하루는 홍사신(洪士信)이 그 방에 먼저 오고, 인성이 뒤에 와서 말을 나누는 사이에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둘 다 불편한 기색이 있었다. 조금 후에 인성이 배를 움켜쥐고,
“소합원(蘇合元)이 있는가?”
하니, 좌우가 모두 없다고 하였다. 사신만이 곧 말하기를,
“소인이 마침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드리니, 인성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것을 받았다.
○ 간관(諫官)이 아계 이산해의 죄를 논의하여 법으로 처형하려고 하는데, 서애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상(子常)이 나에게 말하기를,
“유(柳)를 만일 함께 논의한다면 국사에 있어서 불미한 처사이니, 그 사이에 또한 어찌 차등이 없을 수 있겠는가. 빨리 아는 사람에게 통지하시오.”
하였다. 나는 대궐 문 밖에서 마침 윤 가회(尹可晦)를 만나, 그를 함께 논의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중에, 해평이 오기에 또한 이것을 힘주어 이해시켜 드디어 중지시켰다. 아계옹(鵝溪翁)과 서애를 논의하자는 말은 원유(元裕)가 주장한 것이다. 윤의 이름은 방(昉)이다. 임진강 싸움에서 패한 뒤에 여러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평양은 서울처럼 꼭 지켜야 할 곳은 아니니, 버리고 떠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오음만이 평양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다가 그것을 말리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또 아뢰기를,
“서쪽 의주로 향하다가 상국(上國)에 달려가 호소하는 것이 대의가 됩니다.”
하고, 상ㆍ중ㆍ하의 세 가지 대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상은 그것을 채택치 아니하고 드디어 여러 사람의 의론을 따랐다.
장차 북쪽을 향해 함흥(咸興)으로 가려 하는데, 심공직(沈公直)이 부제학이 되어 함흥의 설을 주장하였다. 이윽고 이일(李鎰)이 대탄(大灘)으로부터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말하기를,
“이일은 용렬한 부류가 아니니, 마땅히 이 사람을 기다려서 거취를 정해야 한다.”
하였다. 이일이 당도하자, 상하가 모두 말하기를,
“이일이 무슨 말을 할까”
하였다. 오음이 말하기를,
“평양을 포위하려 하는데, 공의 뜻은 어떠하오?”
하니, 이일이 말하기를,
“적의 기세는 당해낼 수 없소. 함흥은 북쪽에 용감한 토병(土兵)이 있고, 남쪽에는 험준한 산천이 있으니, 믿고서 견고한 곳이 될 만합니다.”
하였다. 심공직이 이일의 뒤에 앉았다가 갑자기 그의 등을 치며 말하기를,
“참으로 장수다운 말이오.”
하니, 징원(澄源)이 분연히 성내어 말하기를,
“모두 용렬한 사람이다.”
하였다. 오음 또한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심의 이름은 충겸(忠謙)이다.
○ 인성은 익살이 섞인 농담을 잘 하였는데, 난리 중에도 여전하였다. 늘 서애ㆍ공언ㆍ징원 부자와 나 그 외 여러 사람이 연광정(練光亭)에 모여 멀리 적의 불이 소나무 사이에 깜박거리는 것을 보았는데 총소리도 끊이질 않았다. 서애가 울며 말하기를,
“우리들의 생사가 조석에 달렸으니, 이 모임이 영결(永訣)이 아닌 지도 모르겠소.”
하니, 인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결국은 다 함께 죽을 것인데, 어찌 영결이라 하겠소.”
하였다. 서애가 눈물을 닦고 웃으며 말하기를,
“신정(新亭)에서 청담(淸談)이 어찌 없을 수 있소.”
하였다.
평양에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숙직을 폐하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서애ㆍ공저(公著)ㆍ공직(公直)ㆍ수백(守伯) 형제와 내가 그곳에 모였다. 공저가 말하기를,
“우리는 가마솥 안에 있는 고기라 이를 만하오.”
하니,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걸어 다니는 시체요, 달리는 살덩이란 말이 바로 우리를 두고 말한 것이오.”
하였다. 서애가 말하기를,
“그 말은 참 좋은 형용이요.”
하였다. 공저는 이성중(李誠中), 수백은 김신원(金信元)이다.
유지숙(兪止叔)이 평양에 머물며 지키게 되자,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급히 그 아들 대건(大建)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여기에 머물게 되었으니, 어찌할 것인가?”
하니, 대건이 귀에다 대고 얼마 동안 무슨 말을 속삭였다. 유지속은 상께 청하여 공저(公著)로 부랑(副郞)을 삼고 대동관(大同館)으로 나아가 소매를 빼고 교의(交椅)에 높이 걸터 앉았다. 공저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이런 난리를 만나고 또 유홍(兪泓)의 부사(副使)가 되었으니, 어찌 치욕이 아닌가.”
하였다. 오음이 나에게 여러 사람의 말을 전하라 하기에 유지숙에게 가서 말하기를,
“이곳에는 이미 감사ㆍ병사가 있고, 또 따로 순찰사가 있으니, 이것으로 족합니다. 호종(扈從)이 너무 적으니, 다시 부사를 둘 필요가 없지 않소.”
하니, 유지숙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나를 죽이겠다는 것인가. 이미 사지(死地)에 빠뜨리고 또 부사마저 빼앗으려고 하니, 이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
하였다. 이를 돌아와 보고하니, 오음이 웃으며 말하기를,
“기성(杞城)이 어찌 노했겠는가. 반드시 대건이 노한 것이리라.”
하였다. 다시 가서 알리니, 유지숙이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국사는 자제(子弟)와 논하지 않는 법이나, 너의 뜻은 어떠하냐?”
하였다. 대건이 드디어 교의(交椅) 뒤에서 몸을 숨기고 머리만을 내밀고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유지숙이 곧 말하기를,
“차라리 죽을지언정 따를 수 없소.”
하였다. 다음 날 내가 또 공사(公事)로 찾아 가니, 유지숙이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는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또 공저 때문에 온 것이 아닌가 하므로, 나는 공사 때문에 왔다고 대답하고, 또 좌상이 공의 임무를 대행하고 있는데, 공이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고 하였다. 유지숙이 기뻐하면서, 해원(海原)도 부사를 두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유지숙이 말하기를,
“해원이 나를 징계하는 건가?”
하였다. 지숙은 곧 기성(杞城)이다.
자상(子常 이항복)이, 임진강의 방위가 결국 적을 막지 못할 것을 알고는 여러 번 조정에 말하여, 중국에 원병을 청하자고 하였는데, 오음이 채택하지 않았다. 하루는 의주 목사 황진(黃璡)이 파발을 보내 아뢰기를,
“관전총병(寬奠摠兵)이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와 친히 사정(事情)을 탐지한다 하기에, 왜적이 비록 관서에 다가 왔으나 우리 나라 병력으로도 이것을 대적할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총병이 웃고 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대답을 잘못한 죄인을 잡아다 문초하기 위해 별도로 한 재신을 선택하여 보내려 하였다. 오음은 어쩔 수 없이 유회부(柳晦夫)로써 그 선임에 응하였는데, 유회부의 뜻도 오음과 같아서 청병하려 하지 않았다. 자상이 이 때에 대사헌이 되어 장차 말을 만들어 체차하려 하였다. 마침 유회부가 예조 참판에 승직되니, 자상이 소매에 장계 초본을 가지고 있었으나 꺼내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행하지 아니하면 직도 바뀌게 되니 어렵구나.”
하였다. 유의 이름은 근(根)이다.
○ 오음이 청병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유회부를 보낸 뒤에 국사가 점점 급해지니, 명보(明甫)는 조정에 극력 말하여 급히 천조에 청병하자고 하자, 오음이 마침내 이를 따랐다. 도리어 오음은 처음부터 청병을 주장하던 자와 같이 하였다. 명보는 이덕형(李德馨)이다.
○ 내가 자상(子常)에게 묻기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명보가 관동으로부터 평양으로 따라 가던 날, 마침 어버이 곁에 있으면서 사람들이 길에서 장방창(張邦昌)의 고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서 오히려 빨리 출발하지 않고 엿세 동안 시일을 끌었다.’ 하는데, 나는 명보와 서로 알지는 못하나 이 말이 과연 근사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명보는 반드시 그 말이 놀랄 만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엿새 동안 시일을 끌었을 것이니, 무엇이 이상하오?”
하였다. 내가 또 어찌 억측으로 사람을 평가하겠느냐고 하자, 대답하기를, 마음에 반분이라도 의심하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에 안다고 하였다.
명보는 평양으로 뒤쫓아 와서, 인심이 이반되어 일을 할 수 없다고 극력 말하였다. 이어서 그는 인심을 위무(慰撫)할 수 있는 것을 진술하였는데, 끝말은 왕의 양위(讓位)와 그리고 왕의 자책(自責) 등의 일을 지적하는 것 같았으나, 오음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 말은 내지 못했다.
홍사신은 천성이 호걸스럽고 교만하여, 일찍이 남에게 굽히는 일이 없었다.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려 하니, 그는 집으로 가 행장을 꾸려 호위하려 하였다. 그 때 길가의 난민들이 큰 막대로 그의 등을 치며 말하기를,
“금관자(金貫子)ㆍ옥관자(玉貫子)를 단 도적들아! 평시에는 많은 녹봉으로 잘 살고 있다가, 이미 도둑을 막지 못하더니 또 임금에게 우리를 버리고 가게 하느냐.”
하면서, 마구 때렸는데, 말에서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그는 다른 이에게 오늘 죽을 뻔 하였다고 말하고는 등을 만지며 아픈 것을 참고 앉았다. 징원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마음은 평양 사람에게 이미 죽은 것이네.”
하였다.
○ 평양에 승정원을 설치하고 또 주서방(注書房)을 두었는데, 궁벽하여 일이 없으므로 여러 사관들이 청담이나 농담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하루는 내가 그 방에 가니, 임진초(任晉初)가 슬픈 어조로 격동되어 말하기를,
“연로한 재상들은 부귀를 오래도록 누려서 비록 난리를 만났다 해도 유감이 없겠지만, 그대의 나이 겨우 20이 넘었고, 조정에 벼슬한 지는 1년도 못 되었는데, 어버이와 집을 떠나 우리와 함께 난리에 죽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하오.”
하니, 이 말에 백준(伯峻)ㆍ선계(善繼)도 거들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말을 하는지 매우 괴이쩍었다. 다음 날 아침에 공저(公著)가 대중 앞에서 소리 높여 말하기를,
“사관으로 나이 어린 두세 무리가 스스로를 생각하기를, 조정에 선 지가 오래지 아니하니, 옛 임금님에게 그다지 큰 의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여 위태로운 발언을 함에 이르렀고, 무사를 유인하여 같이 달아날 계획을 세우려고 하니, 진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은 조공(趙公)이 너무 심하다고 말하였다. 임의 이름은 취정(就正)이고, 백준은 김선여(金善餘), 선계는 조존세(趙存世)이다.
오음이 정승이 된 뒤에 자못 시국을 담당하고 나가니, 최ㆍ유 두 분은 팔장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오음이 상처(喪妻)하여 비변사에 나오지 아니하니, 여러 재상들이 종일토록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일도 처리하지 못하였다. 공저가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정승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치 병아리 떼가 어미를 잃어버림과 같아서 논의하여도 절충할 곳이 없습니다.”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영의정, 우의정은 정승이 아닙니까?”
하니, 공저가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논의는 할 수 있지만 절충은 해내지 못합니다.”
하였다. 최의 이름은 흥원(興源)이고, 유의 이름은 홍(泓)이다.
김의백(金宜伯)이 어전에서 평안ㆍ함경도에 대한 지리의 원근을 논하였는데 매우 자세하였다. 상이 기재(奇才)라 생각하여 병조의 낭관으로 발탁하고는 북도를 탐지해 오게 하였다. 김의백이 떠날 때 울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서북의 이해(利害)에 대하여 조정의 의론이 이미 한결같지 않고, 상의 마음 또한 결정한 것이 없으니, 나는 반드시 중도에서 낭패하여 임금과 어버이 둘 다 못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걸음이 영원한 이별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대가가 의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양덕(陽德)에 도착하니, 사신(士信)이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벌써 요동으로 건너 가시고 세자는 간 곳을 모르니, 사세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하니, 김의백이 통곡하고 갔다고 한다. 김의 이름은 의원(義元)이다.
오음이 여러 사람과 인물을 논할 적에 위압함이 있어 감히 떠들지를 못했다. 어느 날 상이 여러 재신(宰臣)에게 일을 의논하게 하자, 좌우 신하들이 각각 소견을 말하고 그것을 옳다고 여겨 꼭 자기의 주장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상도 여러 의론이 한결같지 않음을 들어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오음이 말하기를,
“옛 사람은 말을 드릴 뿐이옵고 그것이 시행되고 안 되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아니하오면 어떻게 여러 계책을 굽힌다[屈群策]하겠나이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그렇소.”
하였다. 여러 사람이 드디어 잠잠하였다.
○ 적이 임진강을 건너자 조정에서 생각하기를, 중화(中和)는 평양과 가까우니 수령을 불러들이는 것만 못하다 하고, 바로 군수 김요립(金堯立)을 불렀다. 이 때에 서애는 마침 이 의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金)이 와서 뵙자, 서애는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도 도주한 것이다.”
하고, 빨리 효수(梟首)하려고 계주(啓奏)하기에 이르렀다. 오음과 여러 재신이 그 곡절을 낱낱이 말하자, 서애가 말하기를,
“수령이 도주를 잘 하는 것은 군률이 엄하지 않기 때문이니, 용서할 수 없소.”
하였다. 여러 사람이 극력 해명했으나 듣지 않더니, 결국은 사형을 감하고 장(杖)을 치기로 결정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다. 도주하고서 산 자는 무수히 많지만 도주하지 않고 죽을 뻔한 자는 이 사람 뿐이다. 마땅히 도주하는 것이 쌀밥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 만하다.”
하였다.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 또 해암(蟹岩)에서 승전한 일이 있으므로 조정에서는 특별히 그를 우대하였다. 대탄(大灘)의 군사가 무너지자, 이양원(李陽元) 이하가 혹은 흩어져 도주하고 혹은 북도(北道)로 들어갔는데, 이일만은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향하니, 조정에서 그를 더욱 가상하게 여겼다. 그는 도중에 먼저 사람을 보내어 성을 지키는 방책을 올렸는데, 매우 조리가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기쁘게 여겼다. 조정에 나오는 날, ‘대가는 함흥으로 피해야 하고 평양은 지킬 수 없다.’고 즉시 말하자, 이명보(李明甫)ㆍ심공직(沈公直)이 뒤편에 있다가 극력 찬성하니, 상하가 실망하였다. 오음이 이일에게 묻기를,
“공은 어째서 평양을 포기하는 것이 성을 지키는 계책이라 말했소.”
하니, 이일이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종사관이 스스로 한 짓이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오음이 어찌하여 서명하였느냐고 묻자, 이일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오음이 다른 사람에게 이 사람은 실성했다고 말하였다.
심사진(沈士進)이 나와 함께 비변사에 있을 적에 의론이 시사(時事)에 미쳐서 내가 말하기를,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심사진이 대답하기를,
“근심하지 마오. 중흥(中興)은 멀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심사진이 대답하기를,
“홍연길(洪延吉)의 아들이 어리석고 글자도 모르는데 어느 날 꿈에 글 한 구절을 얻었습니다. 그 글에,
보슬비 오는 날 버들은 푸른 빛을 머금었는데 / 細雨天含柳色靑
샛바람 불어와 말발굽이 가벼웁네 / 東風吹途馬蹄輕
태평해져 명관들이 조정으로 돌아 오는 날 / 太平名官還朝日
승전가를 올리니 기쁜 소리 장안에 가득하구나 / 奏凱歡聲滿洛城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묘년(1591, 선조 24) 겨울의 일입니다. 홍연길의 적소(謫所)로 부쳐 보내며, 오래지 않아서 귀양이 풀릴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홍연길이 꾸짖어, 누구에게 속임을 당하여 이런 말을 하느냐 하였으니, 어찌 중흥의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연길에게 묻기를,
“이 말이 과연 그러했습니까?”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문리(文理)가 넉넉지 못하여 주개(奏凱)를 내가 석방되어 돌아 가는 징조로 해석한 모양입니다. 천함(天含)이란 또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만일 중흥의 공을 논하게 되면 그대의 아들이 제일이겠습니다.”
하니, 홍연길도 웃었다. 심의 이름은 우승(友勝). 홍의 이름은 종록(宗祿)이다.
유지숙(兪止叔)이 정승이 되니,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했기 때문이다. 유지숙이 하직하고 나간 뒤에 상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우상이 어떠냐고 말하자, 어떤 이가 기절(氣節)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에 상은, 기절은 어떤지 모르겠거니와 단지 생각하지 않고 말을 한다고 하였다. 그 후에 송강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신하를 알기는 임금만한 이가 없다. 형용을 잘함이 이 넉 자(불사이언(不思而言))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유지숙이 비변사에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동쪽에서 왔는데 말하기를, 적의 형세가 고단하고 취약하다고 하면 꼭 이 사람은 쓸 만하다 하고, 적의 형세가 성하다고 하면, 꼭 이 사람은 쓸 만한 사람이 못 된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기롱하여 말하기를,
“공은 사람을 올리고 낮추는 것이 모두 혀끝에서 나오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니, 유지숙이 대답하기를,
“적진의 형태를 자세하게 보아야 외롭고 약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쓸 만한 것이요, 단지 적이 횡행하는 것만을 멀리서 바라보고 성하다고 말하는 자는 쓸 만하지 못한 것이오.”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웃으며, 정승다운 말씀이라 하였다.
요인(妖人) 이화(李和)가 《논명서(論命書)》를 얻어서 곧잘 사람들의 평생을 점쳤는데 간혹 맞는 것도 있었다. 유지숙이 신묘하게 여겨 꼭 그와 함께 다녔다. 유지숙이 체찰사가 되어 길흉을 물었더니, 이화가 말하기를,
“금년에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것입니다.”
하였다. 유지숙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내가 중흥의 제일 공신이 될 것이다 하면서 자못 자부심을 보였다. 뒤에 또 점을 치니, 이화는 본명(本命)은 매우 좋으나 점사(占辭)는 극히 흉하다고 하였다. 이에 유지숙이 멍하니 낙심하여 감히 길을 떠나지 못했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비록 이화의 점사가 극히 길하다 하더라도 왜적이 망하지 아니하면 운이 오지 않을 것이니, 어쩌겠는가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아니꼬와 했다.
서울을 떠나던 날, 상하가 매우 두려워하여 모두, 중도에 반드시 큰 변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니, 인심이 서늘해져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여기고, 따르던 관리들도 주저하는 기색이 있어, 이미 옷을 바꾸어 입었다. 동파역(東坡驛)에 당도하자 자상(子常 이항복)과 나는 중숙(重叔)의 뒤에 있었는데, 내가 웃으면서 흑각관자(黑角貫子 서인이 사용하는 것)를 가리키니, 중숙이 벌써 자기를 놀린 줄 알았다. 이날 저녁에 다시 금관자로 바꾸었다. 중숙은 김응남(金應南)이다.
[주D-001]신정(新亭) : 중국 강소성(江蘇省)에 있는 정자 이름. 동진(東晉)의 여러 명사들이 피란 와서 매양 휴일이면 이 정자에 모여 놀았다. 그런데 주개(周顗)는 이 곳에서 봄을 맞이하자 조국이 그리워서 눈물을 흘렸다 함.
[주D-002]장방창(張邦昌) : 송(宋)의 동광(東光) 사람. 송 흠종(宋欽宗) 초년에 금인(金人)이 변경(汴京)을 함락하자, 휘종(徽宗)과 흠종을 사로잡아 북으로 가서 초제(楚帝)가 되었음.
ⓒ 한국고전번역원 ┃ 양대연 (역) ┃ 1974
국조보감 제31권 원문이미지
확대 원래대로 축소
선조조 8
25년(임진, 1592)
○ 2월. 대장(大將)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파견하여 각 도의 병기 시설을 순시하도록 하였다. 이일은 양호(兩湖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임)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와 해서(海西)로 갔다가 한 달 뒤에 돌아왔다.
○ 4월. 14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략해 와서 부산진(釜山鎭)을 함락시켰는데 첨사(僉使) 정발(鄭撥)이 전사하고, 이어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면서 부사 송상현(宋象賢)도 전사하였다.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가 그들에게 명 나라를 공경하는 길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침내 여러 섬의 군사 20만을 징발하여 직접 거느리고 일기도(一歧島)까지 이르러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장수에게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대마도주 평의지(平義智)와 평조신(平調信)ㆍ행장(行長)ㆍ현소(玄蘇)를 향도로 삼아 4~5만 척의 배로 바다를 뒤덮고 와 이달 13일 새벽 안개를 틈타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 첨사 정발은 전선(戰船)에다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砲)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다가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지역 안의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두 데리고 성에 들어가 나누어 지켰다. 병사 이각(李珏)도 병영(兵營)에서 달려왔으나 조금 지나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핑계대기를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즉시 나가서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쳤으므로 즉시 포위를 당하였다. 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나절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적이 마침내 모여들어 생포하려고 하자 상현이 발로 걷어차면서 항거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에 상현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부채에다 “달무리 끼고 포위당한 외로운 성에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를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게 되었어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집안 종에게 주어 그의 아비 복흥(復興)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평조신이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棺)에 넣어 성밖에 묻어주고 푯말[標]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
갑오년(1594, 선조 27)에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가 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만났을 때 청정이 그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또 집안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반장(返葬)하도록 허락하는 한편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다. 그 뒤 이조 참판에 추증하고 그의 아들 중 한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서인(庶人)인 신여로(申汝櫓)가 상현을 따랐었는데 상현이 돌려보냈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난리를 당하여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 하고 도로 성으로 들어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 적에 대한 보고가 이르자 대신과 비변사가 빈청(賓廳)에 모여,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중로(中路)에 내려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좌도(左道)에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서로(西路)에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시켜 경주 부윤으로 삼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모두 현재 소유한 병력이 없어 단지 스스로 군관(軍官)을 뽑아 대동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함락되고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잇따라 이르니 도성의 인심이 크게 흔들렸다. 당시 사방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으나 아직 이르지 않으므로 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대간이, 대신(大臣)을 체찰사(體察使)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단속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청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유성룡(柳成龍)을 보낼 것을 청하니 따랐고, 김응남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성룡이 신립(申砬)에게 계책을 물으니, 신립이 말하기를,
“이일이 열세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후속 병력이 없다. 체찰사가 내려간다 하더라도 전투하는 장수가 아니니 무장(武將)을 급히 먼저 보내 이일을 지원하도록 하여야 한다.”하였다. 이에 성룡이 김응남과 뵙기를 청하여 신립을 먼저 보내기를 청하자, 상이 신립을 불러 하문하니 신립도 사양하지 않으므로 마침내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신립이 떠나려 할 때에 상이 불러 보고 보검(寶劍)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일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참(斬)하라.”
하였다. 당시에 상이 김여물(金汝岉)의 재능과 용맹을 아까워하여 방어해야 할 긴요한 곳에 정배(定配)시켜 공을 세워 보답하도록 명하였다. - 이에 앞서 김여물이 의주 목사로 있으면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었다. - 여물이 출옥(出獄)하자 성룡이 불러 계책을 의논해 보고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이번에 여물을 처음 보고 병사(兵事)를 의논해 보니, 무용(武勇)과 재략(才略)이 남보다 뛰어날 뿐만이 아닙니다. 막중(幕中)에 두고 계책을 세우는데 자문하도록 하였으면 합니다.”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신립이 또 청하기를,
“신이 일찍이 서로(西路)의 진영을 맡았을 적에 여물을 알았는데 재능과 용맹뿐만이 아니라 충의(忠義)의 인사였습니다. 신에게 소속시켜 먼저 가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또 따랐다. 신립이 거느린 무리는 도성의 무사(武士)ㆍ재관(材官)과 외사(外司)의 서류(庶流)ㆍ한량인(閑良人)으로 활을 잘 쏘는 자 수십 명이었다. 조정의 관원으로 하여금 각기 전마(戰馬) 한 필씩을 내어 돕도록 하였다. 이들이 인근 고을을 순행하며 군사를 수합 하였는데 겨우 80명이었다.
○ 왜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배하여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지(朴篪)ㆍ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權吉)이 모두 죽었다. 이일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립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 적병이 충주(忠州)에 침입하였는데 신립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처음에 신립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김여물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립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계를 올려 이일을 용서하여 종군(從軍)하게 해서 공로를 세우도록 청하고 드디어 군사를 인솔하여 도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물은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종을 보내어 아들 김류(金瑬)에게 편지를 부치기를,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되고 마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하였다. 신립이 군사를 인솔하여 탄금대(彈琴臺)에 - 충주 읍내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다. - 나가 주둔하여 배수진을 쳤는데, 이 달 27일에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이튿날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大陣)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右軍)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 병기가 햇빛에 번쩍이고 포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신립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며, 적이 벌써 사면으로 포위하므로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시체가 강을 덮을 정도였다.
신립이 여물과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적 수십 명을 죽인 뒤에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일은 사잇길을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가 왜적 두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쏘아 죽여 수급(首級)을 가지고 강을 건너서 치계(馳啓)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처음으로 신립이 패하여 죽은 것을 알았는데, 병조에서는 마침내 이일의 죄를 용서하였다.
난중잡록 임진년 상上편의 상주전투 기록
"25일.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매, 이일(李鎰)이 대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날 새벽 안개가 자욱할 무렵 포성이 들려 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당도했음을 바로 알아채고 이일이 성 밖 북천(北川)에 나가 진을 치다.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다. 종사관 박지(朴篪), 이일의 종사관이다. 이경류(李慶流), 변 기(邊璣)의 종사관이다. 윤섬(尹暹)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살해되었고, 이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려 충주(忠州)로 돌아오다. 박지는 김수의 사위다. 그때 나이는 22세,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되었었다. 박지가 자기 군중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하여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박지는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함양(咸陽) 사람 인언룡(印彦龍)을 만나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받았건만 지금 전쟁이 불리해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용안(龍顔)을 뵙겠나.”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다."
위 기록으로 보아 계명산을 내려와 충주성을 갑자기 쳐먹은 왜倭의 대진大陣(사쿠에몬)은 기병이 주력임.
"당초에 이일(李鎰)이 서울 정예병 3백 명을 거느리고 가려고 병조에서 선발해 놓은 병안(兵案)을 가져다 보니 여염 시정(市井)의 백도(白徒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장정들)ㆍ서리(胥吏)ㆍ유생들이 반을 차지했다. 임시 점고하니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詩卷)을 가지고서, 아전들은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병역을 면하고자 하소하는 자가 뜰에 꽉 차서 보낼 사람이 없었다. 이일이 3일이나 못 떠나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이일만 먼저 출발하고 별장(別將) 유옥(兪沃)이 나중에 거느리고 가도록 하였다." -《징비록》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