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전투 사료집 B

상주 전투 사료집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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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전투 당시 이일군이 6천명에 , 변기군이 2만명. 





그리고 그 앞엔 화살받이로 상주민병대가 1천명.  가짜정예병 300명 유생들이 서있었음.







상주 전투에 조선군은 2만명 대군大軍이 이일 바로 뒤에 와있었다.





징비록 사극이 숨긴 상주전투 변기군 2만의 참전







조령의 방어사이자 조방장인 변기는 상주 전투에 참전했음. 그 증거가 연려실기술에

상주전투에서 변기가 전사한것처럼 잘못 기록되어있음. 그리고 선조수정실록에 변기의 종사관인 이경류, 이일의 종사관인 박지가 상주전투에 이일과 함께 참전해있었다고나옴.

변기의 종사관도 이일의 종사관 , 이일과 함께 와있으니 변기두 와있는거임.

고니시 유키나가는 상주에 이일 뒤에 있는 조선군을 대략 2만명이라고 봄.  

그게 바로 변기군 2만이었음





서애집 ,상촌집 기록에 의하면 상주전투 이후 변기군은 이일군과 함께 신립군에게로 합류함.



정조실록에도 상주전투 당시 조선군이 대군大軍이라고 분명히 나옴.







"대신(大臣) 및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청대(請對)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글로 아뢰어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서 중로(中路)로 내려가고, 성응일(成應一)을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삼아서 동로(東路)로 내려가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서 서로(西路)로 내려가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고, 경주 부윤(慶州府尹) 윤인함(尹仁涵)은 나약(懦弱)하므로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변응성(邊應星)을 경주 부윤으로 삼되 모두 군관(軍官)을 자기가 선택하여 맡은 곳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이 때에 여러 신하들이 날마다 궐하(闕下)에 모여서 방비할 대책을 강구하나 어찌할 계책이 없어 둘러 앉아서 황급할 뿐이었다. 어느 사람이 건의하기를,
“적이 창과 칼을 잘 쓰는데 우리는 단단한 갑옷이 없으니 어찌 막아내리요. 그러므로 적을 당하지 못하니 두꺼운 쇠로써 온몸에 두른 긴 갑옷을 만들어 입으면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도 찌를 만한 틈이 없을 터이니 우리가 이길 수 있겠다.”
하니, 여러 사람이 그렇다고 여겨 이에 칠공들을 많이 모아서 밤낮으로 두들겨 만들었다."-재조번방지 



[출처] 유성룡의 자백 (『미마나 교회 (임나任那 하나로우花郞 Church)』)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8번째기사

왜적이 상주에 침입하자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다      

왜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였다. 처음에 경상 감사 김수(金晬)가 적변(賊變)을 듣고는 곧바로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의거하여 군대를 분배시킨 뒤 여러 고을에 이문(移文)하여 각각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약속된 지역에 나아와 주둔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조령 밑의 문경(聞慶) 이하 수령들이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大邱)로 달려와 둔병하여 원야(原野)에서 노숙하였는데 전혀 통제가 되지 않은 채 순변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적의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많은 군사가 놀라 동요하여 밤중에 진이 저절로 무너졌는데 수령들이 단기(單騎)로 도망하여 돌아왔었다.

그 뒤에 이일이 비로소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이미 고을이 한 사람도 없이 텅 빈 상태였다. 이에 스스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들을 먹이고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산곡(山谷)에 들어가 숨었다. 이일이 판관 권길(權吉)을 잡아들여 군대를 뽑도록 당부하였으나 한 사람도 얻지 못하였으므로 참(斬)하려 하였다. 이에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왜적은 이미 선산(善山)에 이르렀다. 저물녘에 개령(開寧)사람이 와서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리자 이일이 여러 사람들을 미혹시킨다고 하여 참(斬)하였다. 이일의 군사는 척후(斥候)가 없는데다가 백성들이 또한 감히 알리지 못했기 때문에 적병이 벌써 상주 남쪽 20리 되는 냇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도 알지 못하였다. 이일이 한창 상주 북쪽 냇가에서 습진(習陣)하고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고을의 성 안 몇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으므로 이일이 그제서야 군관 박정호(朴挺豪) 등을 시켜 가서 탐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이 이미 숲 사이에 잠복하여 있다가 즉시 총을 쏘아 죽이고는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갔다. 정호는 본래 용사(勇士)로 유명하여 군인(軍人)이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꺾일 정도의 인물이었다.

적이 마침내 크게 집결하여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일은 곧바로 말을 달려 도망하였으며 군사들은 모두 섬멸되었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호(朴箎)·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이 모두 죽었다. 이일은 군관 한 명, 노자(奴子) 한 명과 함께 맨몸으로 도망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입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3장 B면

【영인본】 25책 612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25일에 적이 상주(尙州)를 함락시키자 순변사 이일(李鎰)이 달아나 충주로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교리(校理) 윤섬(尹暹)ㆍ박지(朴箎)와 방어사의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ㆍ판관 권정길(權井吉)이 죽고, 조방장 변기(邊璣)도 죽었다."-연려실기술









난중잡록 임진년 상上편의 상주전투 기록





"25일.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매, 이일(李鎰)이 대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날 새벽 안개가 자욱할 무렵 포성이 들려 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당도했음을 바로 알아채고 이일이 성 밖 북천(北川)에 나가 진을 치다.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다. 종사관 박지(朴篪), 이일의 종사관이다. 이경류(李慶流), 변 기(邊璣)의 종사관이다. 윤섬(尹暹)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살해되었고, 이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려 충주(忠州)로 돌아오다. 박지는 김수의 사위다. 그때 나이는 22세,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되었었다. 박지가 자기 군중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하여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박지는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함양(咸陽) 사람 인언룡(印彦龍)을 만나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받았건만 지금 전쟁이 불리해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용안(龍顔)을 뵙겠나.”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다."-난중잡록








"임진란에 조정에서 변기(邊璣)를 보내어 조령을 지키게 했는데, 신립이 충주에 이르러서 변기를 휘하로 불러들여 조령의 방어를 포기하였다.
적이 고갯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수일간을 배회하면서 여러 번 척후로 자세히 살펴 복병이 없음을 알고 난 후에 비로소 조령을 통과했다."
- 서애집 잡저(雜著)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잡저(雜著)  조령(鳥嶺)에 성을 쌓다
[출처] 유성룡의 자백 (『미마나 교회 (임나任那 하나로우花郞 Church)』)







"4월 26일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  이 군사로 단월역(丹月驛)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때 이일을 만났는데 이일로 선봉을 삼아 그로 하여금 공적을 세워 보답하게 하였다."-상촌집 







"....음력 4월 24일 상주라는 성채의 전방에 있는 산 위에 조선의 서울로부터 온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는 대략 2만명으로 그들 사이에는 고위 지휘관으로 3명의 귀족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주 단시간 내에 그들을 패주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들의 총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 이상을 무찔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나머지 적병은 울창한 숲 속으로 도주하였으므로 전부 소탕하여 전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합니다...."<u>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데요시의 편지</u>





정조 37권,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4월 4일(병인)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상주 유생 성재열 등의 서장에 의거해 김일을 충의단에 추후 배향할 것을 치계하다      

상주(尙州)의 옛 의사(義士) 김일(金鎰)을 충의단(忠義壇)에 추후 배향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상주 유생 성재열(成載烈) 등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 치계하기를,

“상주의 옛 의사 김일은 만력(萬曆) 임진 연간에 섬 오랑캐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옛 진사 김안절(金安節)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왜적이 점차 가까이 다가옴에 미쳐 안절이 어미가 늙었다는 이유로 피신하자, 김일이 혼자 의병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런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대군大軍으로 증연(甑淵)에 진을 쳤다가 적의 강성함을 보고 도망치고 종사관 윤섬(尹暹) 등이 죽자, 김일이 분개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향리의 의사들을 더욱 모집하여 왜적을 맞아 북계(北溪)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좌우에서 ‘적의 군사는 많고 우리는 적으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말하니, 김일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 패해서 죽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나라를 위해 한번 죽는 의리를 본받아서 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끌고 도망친 자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고는 적과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고 그의 처자식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 중 17세의 딸 하나가 있어 그의 종 영환(永還)과 곧바로 적진으로 가서 시체가 쌓인 속에서 김일의 시체를 찾아내어 거적으로 싸서 백원(白原)에 장사하였다가, 적이 평정되자 묘를 다시 쓰고 백비(白碑)5513) 를 묘 앞에 세우고서 말하기를 ‘백세(百世) 뒤에 반드시 이 비에 글을 새길 자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김안절이 기록한 사적과 죽은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정(趙靖)의 《진사일록(辰巳日錄)》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충의단의 배향하는 반열에서 유독 그만 빠져 있으니, 훌륭한 조정에서 묻힌 것을 드러내 주는 정사에 있어 의당 균등하게 베푸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배향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22장 A면

【영인본】 46책 381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正祖 37卷, 17年(1793 癸丑 / 청 건륭(乾隆) 58年) 4月 4日(丙寅)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상주 유생 성재열 등의 서장에 의거해 김일을 충의단에 추후 배향할 것을 치계하다

○丙寅/追配尙州故義士金鎰于忠義壇。慶尙道觀察使鄭大容, 據尙州儒生成載烈等狀, 馳啓言: “尙州故義士金鎰, 當萬曆壬辰, 聞島夷入寇, 與故進士金安節, 倡義起兵, 及賊鋒漸迫, 安節以母老出避, 鎰專將義兵。 巡邊使李鎰, 以大軍, 陣于甑淵, 見賊盛跳去, 從事官尹暹等死之,鎰憤慨振腕, 益募鄕里義士, 逆倭而陣于北溪。 左右曰: ‘賊衆我寡, 不可輕動。’ 鎰曰: ‘吾固知今日敗死, 而所以爲此者, 只效爲國一死之義, 將以愧棄甲曳兵者之心也’, 與賊鏖戰而死。 妻孥皆死, 有一女年十七, 與其奴永還, 直赴賊陣, 得鎰屍於積屍中, 藁葬白原。 賊平乃窆, 而樹白碑墓前曰: ‘百世之下, 必有銘此者’。 此載金安節所述事蹟及故奉常正趙靖辰巳日錄, 而獨漏於忠義壇配食之列。 在聖朝顯遂之政, 宜有均施之典。” 上特命配侑。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22장 A면

【영인본】 46책 381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요약 : 조령의 방어사이자 조방장인 변기는 상주 전투에 참전했음. 그 증거가 연려실기술에

상주전투에서 변기가 전사한것처럼 잘못 기록되어있음. 그리고 선조수정실록에 변기의 종사관인 이경류, 이일의 종사관인 박지가 상주전투에 이일과 함께 참전해있었다고나옴.

변기의 종사관도 이일의 종사관 , 이일과 함께 와있으니 변기두 와있는거임.

고니시 유키나가는 상주에 이일 뒤에 있는 조선군을 대략 2만명이라고 봄.  

그게 바로 변기군 2만이었음





서애집 ,상촌집 기록에 의하면 상주전투 이후 변기군은 이일군과 함께 신립군에게로 합류함.









이일은 정예병 300, 서울군 6천 궁기병 , 상주민병대 1천 거느리고있었음.















"이일이 장기(壯騎)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선조수정실록

 李鎰率壯騎軍官六十餘人行, 收兵得四千餘人, 促程馳赴。



"이에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선조수정실록

吉願自出招集, 乃達夜搜索村落間, 得數百人(수백인), 皆農民也。 鎰又發倉廩, 誘募散民, 得數百人(수백인), 倉卒徧伍, 合兵僅六千餘人(합병근6000여인)。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기재사초 하 임진잡사





 

"정경세가 아뢰기를,

“근일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이일(李鎰)을 많이 헐뜯고 있습니다만 상주(尙州)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변 초기에 영남 사람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왕사(王師:서울 군대)를 크게 기다렸고, 열군(列郡)의 군졸들은 통속(統屬)할 곳이 없었는데 이일이 상주에 이르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군사를 먹이고 성의 있는 말로 일깨움으로써 하루 사이에 장사 3천 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평야로 나아가 진을 치고 진치는 법을 배워 익힐 무렵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앞 시내에 도착하여 넓은 들판에 가득 차 있었는데도 이일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힘을 다해 싸우던 중 윤섬(尹暹)과 박호(朴箎)가 모두 전사하자 이일이 단기(單騎)로 탈출하여 충주(忠州)에 물러나 있다가 신립(申砬)과 같은 날 패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산(釜山)에서 한번 패배한 뒤로 왜적과 대항하여 싸운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유독 이일만이 군졸을 규합하여 왜적과 접전했으니, 끝내 비록 패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사람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증(李增)이 아뢰기를,

“왜적은 접전할 때에 모두 조총(鳥銃)으로 선봉을 삼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우리 나라는 오합지졸로 선봉을 삼고 용맹한 군사들은 뒤에 있게 하였으므로 선봉대가 무너지자 온 군대가 덩달아 도망쳤습니다. 강찬(姜燦)이 단천 군수(端川郡守)가 되었을 때 왜적과 접전하면서 잠시 전진하고 잠시 후퇴하면서 거짓으로 패하여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적의 탄환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려 군사를 내보내어 짓밟았으니, 강궁(强弓)의 아래에서 전멸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보잘것없는 적이니, 만약 세 부대로 나누어 차차 포(砲)를 쏘면서 교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더라면 어떻게 감히 당해냈겠는가.”

하였다."-선조 65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7월 24일(을미) 1번째기사

대신들과 인견하다





"25일. 아침에 이일이 오히려 적이 없다고 하여 개령 사람을 끌어내어 베어서 여러 사람 앞에 돌리고 인하여 편성(編成)한 민병과 경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을 북쪽 시냇가에서 진법을 연습하느라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대장의 기와 북을 세우고 이일은 그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과 수찬(修撰) 박지(朴箎)와 상주 판관 권길과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등은 다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 있었다."-재조번방지






4월 17일 서울 출발시 이일군 = 장기군관(정예기병군관) 60명에 군사 4천명 (4천 궁기병)





4월 25일 상주 도착 후 상주 민병대 수백명 + 수백명 (상주민병대 1천) 을 수합후 

서울에서 장사 2천(2천 궁기병)이 도착해 이일군에게 합류 = 서울 군대(경중의 군사) 6천 궁기병 , 상주 민병대 1천 





징비록엔 이일군을 정예병 300명만 적어놓고 그 외 군사수는 의도적으로 적지않고있다.



고니시 종군 중 텐카이의 서정일기에는



"4월25일 맑음, 오각에 상주에 돌입. 대장 이욱(이일의 오류)을 패배시킴. 북으로 공격하여 전과 참수 300급"  - 일본 서정일기 4월24일자

라고 적혀있다. 여기 나와있는 참수 300급은 정예병 300명의 모가지일 것이다. 






짤방의 선조수정실록을 보자.







선조수정실록 : 이일은 서울에서 정예기병군관 60명에 군사 4천을 데리고갔다.



선조수정실록 : 이일은 상주에 도착했을때는 군사가 6천여명이었다.(군관 60명당 100명씩 거느린 형태)  민병대 1천명도 별도 부록으로 추가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기재사초 하 임진잡사





당시 사관이 피란 중에 적은 기재사초 : 이일이 상주에서 얻은 군사(민병대)는 1천이었다. 



 







"25일. 아침에 이일이 오히려 적이 없다고 하여 개령 사람을 끌어내어 베어서 여러 사람 앞에 돌리고 인하여 편성(編成)한 민병과 경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을 북쪽 시냇가에서 진법을 연습하느라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대장의 기와 북을 세우고 이일은 그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과 수찬(修撰) 박지(朴箎)와 상주 판관 권길과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등은 다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 있었다."-재조번방지





이일군의 편성 = 서울 장기군관 60 , 6000 군사 + 민병대 1천









프로이스 일본사를 보자. 





"....음력 4월 24일 상주라는 성채의 전방에 있는 산 위에 조선의 서울로부터 온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 저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주 단시간 내에 그들을 패주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들의 총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 이상을 무찔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나머지 적병은 울창한 숲 속으로 도주하였으므로 전부 소탕하여 전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합니다...."-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데요시의 편지



상주민병대 1천 , 정예병 300명만 죽고 나머지 이일군은 모두 숲으로 무사히 후퇴하였다. 











"이일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巡邊使)로서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지켰습니다. 적이 정탐하여 방비가 없음을 알고 밤새 재를 넘어 곧바로 나아가 성을 에워쌌습니다.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게 되자, 우리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금탄(金灘)에 빠지니,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충주는 경도(京都)의 상류에 있으니 충주를 이미 잃었으면 경성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경도 사람들은 이일·신립이 다 중병(重兵 : 많은 군사)으로 험애(險隘)를 막고 있었으므로 날마다 승전의 소식을 기다렸는데 패하였다는 보고가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또 성안(서울)의 정장(精壯)도 먼저 신립·이일과 여러 장관(將官)들이 뽑아 데려 갔고, 제도(諸道)의 원병도 미처 불러 모으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임금은 사세가 이미 급박해진 것을 알고 왕자(王子)와 재신(宰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사방에서 불러 모으게 하고, 자신은 서방으로 옮아가 상국(上國) 지방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정성을 바쳐 천자의 뜰에서 은혜를 빌어 회복을 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나라를 지키는 떳떳한 도리는 아닐지라도 또한 일을 헤아리는 권의(權宜)인데, 과연 천자의 생성(生成)하는 은혜를 입어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적변이 생긴 이래의 대체적인 사정입니다."-선조 4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윤11월 14일(갑오) 2번째기사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 유성룡을 인견하고 중국 사신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다





선조실록 : 이일군은 많은 군사다.

 

 

 

 

[출처] 이일 사료집 (『미마나 교회 (임나任那 하나로우花郞 Church)』)







"적병이 충주(忠州)에 침입하였는데 신입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처음에 신입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얼마 있다가 이일(李鎰)이 이르러 꿇어앉아 부르짖으며 죽기를 청하자 신입이 손을 잡고 묻기를,

“적의 형세가 어떠하였소?”

하니, 이일이 말하기를,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신입이 쓸쓸한 표정으로 의기가 저상되자 김여물(金汝岉)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상촌집의 60만 왜군을 말하는 것)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입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계를 올려 이일을 용서하여 종군(從軍)하게 해서 공로를 세우도록 청하고 드디어 (이일의) 군사를 인솔하여 도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선조수정실록 





이일군 = 기마병으로 편성되어있어서 신립에게 인솔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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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大臣) 및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청대(請對)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글로 아뢰어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서 중로(中路)로 내려가고, 성응일(成應一)을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삼아서 동로(東路)로 내려가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서 서로(西路)로 내려가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고, 경주 부윤(慶州府尹) 윤인함(尹仁涵)은 나약(懦弱)하므로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변응성(邊應星)을 경주 부윤으로 삼되 모두 군관(軍官)을 자기가 선택하여 맡은 곳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이 때에 여러 신하들이 날마다 궐하(闕下)에 모여서 방비할 대책을 강구하나 어찌할 계책이 없어 둘러 앉아서 황급할 뿐이었다. 어느 사람이 건의하기를,
“적이 창과 칼을 잘 쓰는데 우리는 단단한 갑옷이 없으니 어찌 막아내리요. 그러므로 적을 당하지 못하니 두꺼운 쇠로써 온몸에 두른 긴 갑옷을 만들어 입으면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도 찌를 만한 틈이 없을 터이니 우리가 이길 수 있겠다.”
하니, 여러 사람이 그렇다고 여겨 이에 칠공들을 많이 모아서 밤낮으로 두들겨 만들었다."-재조번방지 



[출처] 유성룡의 자백 (『미마나 교회 (임나任那 하나로우花郞 Church)』)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8번째기사

왜적이 상주에 침입하자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다      

왜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였다. 처음에 경상 감사 김수(金晬)가 적변(賊變)을 듣고는 곧바로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의거하여 군대를 분배시킨 뒤 여러 고을에 이문(移文)하여 각각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약속된 지역에 나아와 주둔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조령 밑의 문경(聞慶) 이하 수령들이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大邱)로 달려와 둔병하여 원야(原野)에서 노숙하였는데 전혀 통제가 되지 않은 채 순변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적의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많은 군사가 놀라 동요하여 밤중에 진이 저절로 무너졌는데 수령들이 단기(單騎)로 도망하여 돌아왔었다.

그 뒤에 이일이 비로소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이미 고을이 한 사람도 없이 텅 빈 상태였다. 이에 스스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들을 먹이고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산곡(山谷)에 들어가 숨었다. 이일이 판관 권길(權吉)을 잡아들여 군대를 뽑도록 당부하였으나 한 사람도 얻지 못하였으므로 참(斬)하려 하였다. 이에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왜적은 이미 선산(善山)에 이르렀다. 저물녘에 개령(開寧)사람이 와서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리자 이일이 여러 사람들을 미혹시킨다고 하여 참(斬)하였다. 이일의 군사는 척후(斥候)가 없는데다가 백성들이 또한 감히 알리지 못했기 때문에 적병이 벌써 상주 남쪽 20리 되는 냇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도 알지 못하였다. 이일이 한창 상주 북쪽 냇가에서 습진(習陣)하고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고을의 성 안 몇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으므로 이일이 그제서야 군관 박정호(朴挺豪) 등을 시켜 가서 탐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이 이미 숲 사이에 잠복하여 있다가 즉시 총을 쏘아 죽이고는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갔다. 정호는 본래 용사(勇士)로 유명하여 군인(軍人)이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꺾일 정도의 인물이었다.

적이 마침내 크게 집결하여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일은 곧바로 말을 달려 도망하였으며 군사들은 모두 섬멸되었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호(朴箎)·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이 모두 죽었다. 이일은 군관 한 명, 노자(奴子) 한 명과 함께 맨몸으로 도망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입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3장 B면

【영인본】 25책 612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25일에 적이 상주(尙州)를 함락시키자 순변사 이일(李鎰)이 달아나 충주로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교리(校理) 윤섬(尹暹)ㆍ박지(朴箎)와 방어사의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ㆍ판관 권정길(權井吉)이 죽고, 조방장 변기(邊璣)도 죽었다."-연려실기술









난중잡록 임진년 상上편의 상주전투 기록





"25일.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매, 이일(李鎰)이 대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날 새벽 안개가 자욱할 무렵 포성이 들려 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당도했음을 바로 알아채고 이일이 성 밖 북천(北川)에 나가 진을 치다.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다. 종사관 박지(朴篪), 이일의 종사관이다. 이경류(李慶流), 변 기(邊璣)의 종사관이다. 윤섬(尹暹)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살해되었고, 이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려 충주(忠州)로 돌아오다. 박지는 김수의 사위다. 그때 나이는 22세,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되었었다. 박지가 자기 군중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하여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박지는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함양(咸陽) 사람 인언룡(印彦龍)을 만나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받았건만 지금 전쟁이 불리해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용안(龍顔)을 뵙겠나.”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다."-난중잡록








"임진란에 조정에서 변기(邊璣)를 보내어 조령을 지키게 했는데, 신립이 충주에 이르러서 변기를 휘하로 불러들여 조령의 방어를 포기하였다.
적이 고갯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수일간을 배회하면서 여러 번 척후로 자세히 살펴 복병이 없음을 알고 난 후에 비로소 조령을 통과했다."
- 서애집 잡저(雜著)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잡저(雜著)  조령(鳥嶺)에 성을 쌓다
[출처] 유성룡의 자백 (『미마나 교회 (임나任那 하나로우花郞 Church)』)







"4월 26일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  이 군사로 단월역(丹月驛)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때 이일을 만났는데 이일로 선봉을 삼아 그로 하여금 공적을 세워 보답하게 하였다."-상촌집 







"....음력 4월 24일 상주라는 성채의 전방에 있는 산 위에 조선의 서울로부터 온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는 대략 2만명으로 그들 사이에는 고위 지휘관으로 3명의 귀족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주 단시간 내에 그들을 패주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들의 총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 이상을 무찔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나머지 적병은 울창한 숲 속으로 도주하였으므로 전부 소탕하여 전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합니다...."<u>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데요시의 편지</u>









요약 : 조령의 방어사이자 조방장인 변기는 상주 전투에 참전했음. 그 증거가 연려실기술에

상주전투에서 변기가 전사한것처럼 잘못 기록되어있음. 그리고 선조수정실록에 변기의 종사관인 이경류, 이일의 종사관인 박지가 상주전투에 이일과 함께 참전해있었다고나옴.

변기의 종사관도 이일의 종사관 , 이일과 함께 와있으니 변기두 와있는거임.

고니시 유키나가는 상주에 이일,이경류,박지가 거느리고있는 조선군을 대략 2만명이라고 봄.  숲 속엔 변기군이 숨어있었음. 





서애집 ,상촌집 기록에 의하면 상주전투 이후 변기군은 이일군과 함께 신립군에게로 합류함.
















정조실록의 충격적 기록. 상주전투 때 이일은 대군大軍을 거느리고있었다 !







정조 37권,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4월 4일(병인)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상주 유생 성재열 등의 서장에 의거해 김일을 충의단에 추후 배향할 것을 치계하다      

상주(尙州)의 옛 의사(義士) 김일(金鎰)을 충의단(忠義壇)에 추후 배향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상주 유생 성재열(成載烈) 등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 치계하기를,

“상주의 옛 의사 김일은 만력(萬曆) 임진 연간에 섬 오랑캐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옛 진사 김안절(金安節)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왜적이 점차 가까이 다가옴에 미쳐 안절이 어미가 늙었다는 이유로 피신하자, 김일이 혼자 의병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런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대군大軍으로 증연(甑淵)에 진을 쳤다가 적의 강성함을 보고 도망치고 종사관 윤섬(尹暹) 등이 죽자, 김일이 분개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향리의 의사들을 더욱 모집하여 왜적을 맞아 북계(北溪)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좌우에서 ‘적의 군사는 많고 우리는 적으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말하니, 김일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 패해서 죽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나라를 위해 한번 죽는 의리를 본받아서 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끌고 도망친 자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고는 적과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고 그의 처자식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 중 17세의 딸 하나가 있어 그의 종 영환(永還)과 곧바로 적진으로 가서 시체가 쌓인 속에서 김일의 시체를 찾아내어 거적으로 싸서 백원(白原)에 장사하였다가, 적이 평정되자 묘를 다시 쓰고 백비(白碑)5513) 를 묘 앞에 세우고서 말하기를 ‘백세(百世) 뒤에 반드시 이 비에 글을 새길 자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김안절이 기록한 사적과 죽은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정(趙靖)의 《진사일록(辰巳日錄)》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충의단의 배향하는 반열에서 유독 그만 빠져 있으니, 훌륭한 조정에서 묻힌 것을 드러내 주는 정사에 있어 의당 균등하게 베푸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배향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22장 A면

【영인본】 46책 381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正祖 37卷, 17年(1793 癸丑 / 청 건륭(乾隆) 58年) 4月 4日(丙寅)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상주 유생 성재열 등의 서장에 의거해 김일을 충의단에 추후 배향할 것을 치계하다

○丙寅/追配尙州故義士金鎰于忠義壇。慶尙道觀察使鄭大容, 據尙州儒生成載烈等狀, 馳啓言: “尙州故義士金鎰, 當萬曆壬辰, 聞島夷入寇, 與故進士金安節, 倡義起兵, 及賊鋒漸迫, 安節以母老出避, 鎰專將義兵。 巡邊使李鎰, 以大軍, 陣于甑淵, 見賊盛跳去, 從事官尹暹等死之,鎰憤慨振腕, 益募鄕里義士, 逆倭而陣于北溪。 左右曰: ‘賊衆我寡, 不可輕動。’ 鎰曰: ‘吾固知今日敗死, 而所以爲此者, 只效爲國一死之義, 將以愧棄甲曳兵者之心也’, 與賊鏖戰而死。 妻孥皆死, 有一女年十七, 與其奴永還, 直赴賊陣, 得鎰屍於積屍中, 藁葬白原。 賊平乃窆, 而樹白碑墓前曰: ‘百世之下, 必有銘此者’。 此載金安節所述事蹟及故奉常正趙靖辰巳日錄, 而獨漏於忠義壇配食之列。 在聖朝顯遂之政, 宜有均施之典。” 上特命配侑。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22장 A면

【영인본】 46책 381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정조실록의 충격적 기록. 상주전투 때 이일은 대군大軍을 거느리고있었다 !





6000명을 대군이라고 할리는 없음. 









"....음력 4월 24일(4월 25일) 상주라는 성채의 전방에 있는 산 위에 조선의 서울로부터 온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는 대략 2만명으로 그들 사이에는 고위 지휘관으로 3명의 귀족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주 단시간 내에 그들을 패주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들의 총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 이상을 무찔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나머지 적병은 울창한 숲 속으로 도주하였으므로 전부 소탕하여 전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데요시의 편지









정조 37권,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4월 4일(병인)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상주 유생 성재열 등의 서장에 의거해 김일을 충의단에 추후 배향할 것을 치계하다      

상주(尙州)의 옛 의사(義士) 김일(金鎰)을 충의단(忠義壇)에 추후 배향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상주 유생 성재열(成載烈) 등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 치계하기를,

“상주의 옛 의사 김일은 만력(萬曆) 임진 연간에 섬 오랑캐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옛 진사 김안절(金安節)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왜적이 점차 가까이 다가옴에 미쳐 안절이 어미가 늙었다는 이유로 피신하자, 김일이 혼자 의병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런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많은 군사로 증연(甑淵)에 진을 쳤다가 적의 강성함을 보고 도망치고 종사관 윤섬(尹暹) 등이 죽자, 김일이 분개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향리의 의사들을 더욱 모집하여 왜적을 맞아 북계(北溪)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좌우에서 ‘적의 군사는 많고 우리는 적으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말하니, 김일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 패해서 죽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나라를 위해 한번 죽는 의리를 본받아서 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끌고 도망친 자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고는 적과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고 그의 처자식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 중 17세의 딸 하나가 있어 그의 종 영환(永還)과 곧바로 적진으로 가서 시체가 쌓인 속에서 김일의 시체를 찾아내어 거적으로 싸서 백원(白原)에 장사하였다가, 적이 평정되자 묘를 다시 쓰고 백비(白碑)5513) 를 묘 앞에 세우고서 말하기를 ‘백세(百世) 뒤에 반드시 이 비에 글을 새길 자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김안절이 기록한 사적과 죽은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정(趙靖)의 《진사일록(辰巳日錄)》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충의단의 배향하는 반열에서 유독 그만 빠져 있으니, 훌륭한 조정에서 묻힌 것을 드러내 주는 정사에 있어 의당 균등하게 베푸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배향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22장 A면

【영인본】 46책 381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正祖 37卷, 17年(1793 癸丑 / 청 건륭(乾隆) 58年) 4月 4日(丙寅)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상주 유생 성재열 등의 서장에 의거해 김일을 충의단에 추후 배향할 것을 치계하다

○丙寅/追配尙州故義士金鎰于忠義壇。慶尙道觀察使鄭大容, 據尙州儒生成載烈等狀, 馳啓言: “尙州故義士金鎰, 當萬曆壬辰, 聞島夷入寇, 與故進士金安節, 倡義起兵, 及賊鋒漸迫, 安節以母老出避, 鎰專將義兵。 巡邊使李鎰, 以大軍, 陣于甑淵, 見賊盛跳去, 從事官尹暹等死之, 鎰憤慨振腕, 益募鄕里義士, 逆倭而陣于北溪。 左右曰: ‘賊衆我寡, 不可輕動。’ 鎰曰: ‘吾固知今日敗死, 而所以爲此者, 只效爲國一死之義, 將以愧棄甲曳兵者之心也’, 與賊鏖戰而死。 妻孥皆死, 有一女年十七, 與其奴永還, 直赴賊陣, 得鎰屍於積屍中, 藁葬白原。 賊平乃窆, 而樹白碑墓前曰: ‘百世之下, 必有銘此者’。 此載金安節所述事蹟及故奉常正趙靖辰巳日錄, 而獨漏於忠義壇配食之列。 在聖朝顯遂之政, 宜有均施之典。” 上特命配侑。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22장 A면

【영인본】 46책 381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정조 36권, 16년(1792 임자 / 청 건륭(乾隆) 57년) 12월 14일(무인) 2번째기사

상주 유학 맹진태 등이 충렬사에 문열공 윤섬 등을 함께 봉양한 것에 대해 증연 옆에 원우를 세울 것을 청하나 허락치않다      

상주(尙州) 유학 맹진태(孟鎭泰)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은혜로운 전교가 내려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상주의 세 충신을 충렬사(忠烈祠)에 함께 봉향하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이 고을에 살고 있는 신들로서 다행히 이런 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옛날 섬 오랑캐들이 창궐하던 때 문열공(文烈公) 윤섬(尹暹), 증 도승지 이경류(李慶流), 증 직제학 박지(朴篪)가 함께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막하에 있으면서 전쟁에 참가하였는데, 상주의 증연(甑淵)에 이르렀을 때 적들이 나타나자 이일은 도망쳐버리고 세 신하가 맨주먹을 들어 힘껏 치다가 힘이 다하여 적을 꾸짖으며 죽어갔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 땅을 이름하여 학사담(學士潭)이라 하였습니다.

고을의 선비 김준신(金俊臣)은 본시 얽매임이 없는 자품으로 관리들의 추증을 받아 언제나 선봉이 되었는데, 칠곡(漆谷)의 석전(石田) 전투에서 준신이 여러 장사들을 타일러 본진으로 돌아가서 그 곳을 지키기로 했다가 성은 외롭고 군사는 적어 증연에서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실로 세 신하와 한날 죽은 것입니다. 그의 피에 젖은 시체를 묻은 곳이 지금도 완연하기에 고(故) 참봉 성이한(成爾漢)이 몇 칸 사옥(祠屋)을 지어 네 충신을 함께 제사 지내다가 조정의 금령으로 철거하였고 이한의 손자인 성최열(成最烈)이 그 곳에다 단(壇)을 쌓고서 사사로이 경절단(景節壇)이라 이름하고는 그들이 순절한 날을 기해 술을 부어 제사를 드려온 지도 여러 해 되었습니다.

너무 다행스럽게도 세 신하를 다시 생각하시어 그 이웃 사우(祠宇)에다 함께 제향을 드리도록 하였으니 듣고 본 사람이면 감격하지 않을 자 누구이겠습니까. 다만 충렬사는 함께 제향받는 분들이 원래 많은데 게다가 네 충신을 함께 모시게 되면 원우(院宇)를 다시 짓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지어 영령을 새로 모시는 것보다는 그 제단 자리에다 한두 칸의 집을 지어 세 충신을 제향하고 준신을 배향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혹자는 서원을 새로 세우는 일은 사체가 중대하여 함부로 논의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나, 신들의 생각으로는 서간사(西磵祠)는 나무와 돌만이 남아 있었는데도 이미 특별 하교에 의해 원우를 세웠던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그 도에 명을 내려 증연 옆에다 원우를 세워 세 충신을 제향하고 이어 김준신을 배향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새로 세우는 데 대해서는 금령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모시면 양쪽 다 매우 편리할 것이다. 영남의 서원에 관한 폐단이 주세붕(周世鵬)이 서원을 세웠던 본래의 뜻과는 상반된다. 옛 선왕조 때부터 별도의 금령을 두었던 것도 그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서간사에 사액(賜額)한 것은 특별한 예로서 그 예를 인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54장 A면

【영인본】 46책 367면

【분류】 *정론(政論) / *사상(思想) / *윤리(倫理)








정조 21권, 10년(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2월 26일(경자) 5번째기사

고 현감 양자징을 배향하고 정희등, 김저 등에게 시호를 내리다      

어가가 행차하던 도중에 상언(上言)한 1백 50여 통을 판하(判下)하였다. 장단(長湍) 사람 소태석(邵泰碩)이 상언하여 ‘자신의 성씨는 강절(康節) 4124) 에게서 나왔는데, 명나라 좌통부(左統府) 소영(邵英)의【《명사(明史)》에는 영(榮)으로 되어 있다.】 후손이다.’고 하면서 군적(軍籍)에서 빼달라고 청하였다. 판하하기를,

“강절의 후손이거나 좌통부의 후손이거나 간에 어떻게 억지로 징발할 수 있겠는가? 도백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전라도 진사 이경집(李敬緝) 등이 상언하기를,

“고 현감 양자징(梁子澂)은 기묘 명현(己卯名賢) 양산보(梁山甫)의 아들입니다. 그가 선정신 김인후에게 글을 배웠는데, 김인후가 매우 기특히 여겨 자기의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학문에 뜻을 기울여 조예가 날로 깊어져 선정신 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의 존중을 받았고 그 고장 사람들이 효자라고 조정에 아뢰어 거창(居昌)·석성(石城) 두 고을 원으로 제수되었습니다. 그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그의 행장(行狀)을 엮으면서 칭찬하였으나, 아직도 사당에 제사는 지내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김인후의 사당에 이 사람을 배향한다면 고정(考亭)의 사당에 면재(勉齋) 4125) 를 배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는데, 예조에 하달하였다. 예조에서 말하기를,

“지난 숙종 정축년4126) 에 호남의 선비들이 양자징을 필암 서원(筆巖書院)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지금까지 시행하지 않았으니, 이것만도 선비들의 억울한 일입니다. 성상께서 재량해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그가 선정의 사위로 선정의 학문의 정통을 이어받았고 또 여러 선정들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니, 배향하더라도 의리상 안될 것이 없다. 더구나 선정의 집안에 이제 막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또 그의 후손을 채용하라고 명하였으니, 이때에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므로 허락한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포천(抱川) 사람 정순(鄭淳)이 상언하였는데, 그의 선조 증 이조 판서 정희등(鄭希登)에게 지평 김저(金䃴)의 예를 따라 시호를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희등이 을사 사화 때 곧은 행실로 죽은 사실의 전말이 역사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고 보면 태상(太常)에서 시호를 논의하는 반열에 끼어야 합니다.”

하니, 이조에 하달하였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정희등의 사실이 이미 국사에 기록되어 있고 또 동시에 곧은 행실로 죽은 김저에게 시호를 내린 전례가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 옛 회갑년이 다시 돌아와 선비들의 상심이 더할 것이니, 특별히 시호를 내리라고 허락하는 것이 충신을 포상하는 방도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하교하였다가 곧바로 모두 시호를 내렸다. 이조에서 또 말하기를,

“지례(知禮) 사람 이수태(李遂泰)가 상언하였는데, 그의 선조 이숙기(李淑琦)에게 시호를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숙기는 호조 판서의 벼슬을 하였고 일등 공신으로 녹훈되었으니, 법으로 볼 때 시호를 내려 주어야 하겠습니다. 비록 1백 년이 지나기는 하였으나, 끝내 막는 것은 옳지 못하니, 홍문관에 하달 하소서. 상주(尙州) 사람 이국배(李國培) 등이 상언하였습니다. 상주의 충렬사에 배향된 고 충신 김종무(金宗武)는 부제학 김취문(金就文)의 아들입니다. 임진년에 왜놈들이 쳐들어오자, 김종무가 사근 찰방(沙斤察訪)으로 이일(李鎰)의 군대에 예속되었는데, 중군(中軍)이 패배하자 김종무와 상주 판관 권길(權吉)이 같이 죽었습니다. 그 사실이 《징비록(懲毖錄)》에 기록되어 있고 이미 정문을 세워주었으니, 증직을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선비들이 요청하였으므로 공의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양주(楊州) 사람 이해보(李海普)가 상언하였습니다. 그의 선조 충숙공(忠肅公) 이상길(李尙吉)이 강도(江都)에서 순절하였으니, 김상용(金尙容)·송시영(宋時榮) 등의 전례에 따라 부조(不祧)4127) 의 은전을 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상길이 순절한 사실은 사서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일체로 부조(不祖)의 은전을 내리더라도 안될 것이 없으나 공신 이외에 부조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전례가 아니니, 성상께서 재량해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송시영을 부조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도 다름이 없으니,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8장 B면

【영인본】 45책 555면

【분류】 *정론(政論) / *인물(人物)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윤리(倫理) / *군사(軍事) / *인사(人事) / *풍속-예속(禮俗) / *가족(家族)



[註 4124] 강절(康節) : 송대(宋代)의 학자 소옹(邵雍)의 시호임. ☞



[註 4125] 면재(勉齋) : 고정은 송대의 학자 주희(朱熹)의 호이고, 면재는 그의 제자 황간(黃幹)임. ☞



[註 4126]정축년 : 1677 숙종 23년. ☞



[註 4127]부조(不祧) :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지내게 하는 일. ☞







선조 115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7월 26일(계유) 6번째기사

북벌 출병에 따른 경중 포수와 외방 무사의 출발 시기를 조정하다      

병조에 전교하기를,

“출병(出兵)할 시기가 9월 10일경에 있을 듯한데, 경중(京中)의 포수(砲手)를 8월 보름께 보낸다면 늦지 않겠는가. 외방 무사(武士)를 출발해 보내는 날도 더욱 더디게 되어 그 기한에 대지 못하게 되면 떠나 보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내지 않음으로써 폐단을 없애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니, 다시 참작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본조(本曹)에서는 나름대로 당초에 출병 시기가 9월이 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일(李鎰)의【임진년에 왜적이 상주(尙州)를 침범하였을 때, 이일이 순찰사(巡察使)로 북천(北川)에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과 박호(朴箎)는 죽고 혼자만 간신히 빠져나왔다. 적이 경성을 함락하고 평양(平壤)에 미쳤을 때 이일은 군사를 거느리고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채 미리 겁을 집어 먹고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는데 전후 군대를 무너뜨린 것이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 죄를 묻지는 않고 도리어 위급할 때 의지할 만하다고 하였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 계사(啓辭)를 보니 출병 시기를 10월 보름께로 물리고자 했으므로 외방에서 뽑아 보내고 왕래하는 기간을 헤아려 그 기일을 조금 물려 잡았던 것인데 지금 성교(聖敎)를 받드니 과연 지완(遲緩)되었다 하겠습니다. 포수는 8월 5일에, 경기(京畿)의 무사는 8월 10일에, 강원(江原)·충청(忠淸)·황해(黃海)는 8월 20일에 출발시키는 한편 각도의 차사원(差使員)으로 하여금 함경도 초입의 고을에 교부(交付)하도록 화급히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71책 115권 24장 B면

【영인본】 23책 652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이일이 장기(壯騎)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선조수정실록

 李鎰率壯騎軍官六十餘人行, 收兵得四千餘人, 促程馳赴。



"이에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선조수정실록

吉願自出招集, 乃達夜搜索村落間, 得數百人(수백인), 皆農民也。 鎰又發倉廩, 誘募散民, 得數百人(수백인), 倉卒徧伍, 合兵僅六千餘人(합병근6000여인)。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기재사초 하 임진잡사





"정경세가 아뢰기를,

“근일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이일(李鎰)을 많이 헐뜯고 있습니다만 상주(尙州)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변 초기에 영남 사람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왕사(王師:서울 군대)를 크게 기다렸고, 열군(列郡)의 군졸들은 통속(統屬)할 곳이 없었는데 이일이 상주에 이르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군사를 먹이고 성의 있는 말로 일깨움으로써 하루 사이에 장사 3천 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평야로 나아가 진을 치고 진치는 법을 배워 익힐 무렵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앞 시내에 도착하여 넓은 들판에 가득 차 있었는데도 이일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힘을 다해 싸우던 중 윤섬(尹暹)과 박호(朴箎)가 모두 전사하자 이일이 단기(單騎)로 탈출하여 충주(忠州)에 물러나 있다가 신립(申砬)과 같은 날 패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산(釜山)에서 한번 패배한 뒤로 왜적과 대항하여 싸운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유독 이일만이 군졸을 규합하여 왜적과 접전했으니, 끝내 비록 패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사람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증(李增)이 아뢰기를,

“왜적은 접전할 때에 모두 조총(鳥銃)으로 선봉을 삼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우리 나라는 오합지졸로 선봉을 삼고 용맹한 군사들은 뒤에 있게 하였으므로 선봉대가 무너지자 온 군대가 덩달아 도망쳤습니다. 강찬(姜燦)이 단천 군수(端川郡守)가 되었을 때 왜적과 접전하면서 잠시 전진하고 잠시 후퇴하면서 거짓으로 패하여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적의 탄환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려 군사를 내보내어 짓밟았으니, 강궁(强弓)의 아래에서 전멸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보잘것없는 적이니, 만약 세 부대로 나누어 차차 포(砲)를 쏘면서 교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더라면 어떻게 감히 당해냈겠는가.”

하였다."-선조 65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7월 24일(을미) 1번째기사

대신들과 인견하다





"25일. 아침에 이일이 오히려 적이 없다고 하여 개령 사람을 끌어내어 베어서 여러 사람 앞에 돌리고 인하여 편성(編成)한 민병과 경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을 북쪽 시냇가에서 진법을 연습하느라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대장의 기와 북을 세우고 이일은 그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과 수찬(修撰) 박지(朴箎)와 상주 판관 권길과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등은 다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 있었다."-재조번방지










4월 17일 서울 출발시 이일군 = 장기군관(정예기병군관) 60명에 군사 4천명 (4천 궁기병)





4월 25일 상주 도착 후 상주 민병대 수백명 + 수백명 (상주민병대 1천) 을 수합후 

서울에서 장사 2천(2천 궁기병)이 도착해 이일군에게 합류 = 서울 군대(경중의 군사) 6천 궁기병 , 상주 민병대 1천 







징비록엔 이일군을 정예병 300명만 적어놓고 그 외 군사수는 의도적으로 적지않고있다.



고니시 종군 중 텐카이의 서정일기에는



"4월25일 맑음, 오각에 상주에 돌입. 대장 이욱(이일의 오류)을 패배시킴. 북으로 공격하여 전과 참수 300급"  - 일본 서정일기 4월24일자

라고 적혀있다. 여기 나와있는 참수 300급은 정예병 300명의 모가지일 것이다. 






짤방의 선조수정실록을 보자.







선조수정실록 : 이일은 서울에서 정예기병군관 60명에 군사 4천을 데리고갔다.



선조수정실록 : 이일은 상주에 도착했을때는 군사가 6천여명이었다.(군관 60명당 100명씩 거느린 형태)  민병대 1천명도 별도 부록으로 추가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기재사초 하 임진잡사





당시 사관이 피란 중에 적은 기재사초 : 이일이 상주에서 얻은 군사(민병대)는 1천이었다. 



 







"25일. 아침에 이일이 오히려 적이 없다고 하여 개령 사람을 끌어내어 베어서 여러 사람 앞에 돌리고 인하여 편성(編成)한 민병과 경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을 북쪽 시냇가에서 진법을 연습하느라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대장의 기와 북을 세우고 이일은 그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과 수찬(修撰) 박지(朴箎)와 상주 판관 권길과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등은 다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 있었다."-재조번방지





이일군의 편성 = 서울 장기군관 60 , 6000 군사 + 민병대 1천









프로이스 일본사를 보자. 





"....음력 4월 24일 상주라는 성채의 전방에 있는 산 위에 조선의 서울로부터 온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 저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주 단시간 내에 그들을 패주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들의 총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 이상을 무찔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나머지 적병은 울창한 숲 속으로 도주하였으므로 전부 소탕하여 전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합니다...."-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데요시의 편지



상주민병대 1천 , 정예병 300명만 죽고 나머지 이일군은 모두 숲으로 무사히 후퇴하였다. 











"이일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巡邊使)로서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지켰습니다. 적이 정탐하여 방비가 없음을 알고 밤새 재를 넘어 곧바로 나아가 성을 에워쌌습니다.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게 되자, 우리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금탄(金灘)에 빠지니,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충주는 경도(京都)의 상류에 있으니 충주를 이미 잃었으면 경성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경도 사람들은 이일·신립이 다 중병(重兵 : 많은 군사)으로 험애(險隘)를 막고 있었으므로 날마다 승전의 소식을 기다렸는데 패하였다는 보고가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또 성안(서울)의 정장(精壯)도 먼저 신립·이일과 여러 장관(將官)들이 뽑아 데려 갔고, 제도(諸道)의 원병도 미처 불러 모으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임금은 사세가 이미 급박해진 것을 알고 왕자(王子)와 재신(宰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사방에서 불러 모으게 하고, 자신은 서방으로 옮아가 상국(上國) 지방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정성을 바쳐 천자의 뜰에서 은혜를 빌어 회복을 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나라를 지키는 떳떳한 도리는 아닐지라도 또한 일을 헤아리는 권의(權宜)인데, 과연 천자의 생성(生成)하는 은혜를 입어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적변이 생긴 이래의 대체적인 사정입니다."-선조 4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윤11월 14일(갑오) 2번째기사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 유성룡을 인견하고 중국 사신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다





선조실록 : 이일군은 많은 군사다.

 

 

 

 

[출처] 이일 사료집 (『미마나 교회 (임나任那 하나로우花郞 Church)』)







"적병이 충주(忠州)에 침입하였는데 신입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처음에 신입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얼마 있다가 이일(李鎰)이 이르러 꿇어앉아 부르짖으며 죽기를 청하자 신입이 손을 잡고 묻기를,

“적의 형세가 어떠하였소?”

하니, 이일이 말하기를,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신입이 쓸쓸한 표정으로 의기가 저상되자 김여물(金汝岉)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상촌집의 60만 왜군을 말하는 것)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입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계를 올려 이일을 용서하여 종군(從軍)하게 해서 공로를 세우도록 청하고 드디어 (이일의) 군사를 인솔하여 도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선조수정실록 





이일군 = 기마병으로 편성되어있어서 신립에게 인솔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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