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전투 사료집 C

 

상주 전투 사료집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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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선생집 제56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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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志)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諸將士難初陷敗志]


적병이 처음 부산에 이르렀을 때 망을 보던 관리가 대략 4백여 척쯤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적이 부산을 함락하고 잇따라 그 지역 일대의 진보(鎭堡)를 함락하자 여러 고을에서 멀리 바라만 보고 저절로 무너져 그 뒤로는 망을 보며 정탐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적의 대군이 후속 부대를 계속 보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바다를 덮으며 왔는데도 변장(邊將)이 이를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처음 보고해 온 것에 의거하여 늘 적의 병력은 단지 4백 척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우순찰사(右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은 말하기를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되지 않는데 한 척에 수십 명밖에 싣지 못하는 실정이고 보면 다 합해도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성일의 이러한 주장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도 그렇게만 여겼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출정할 때 단지 군관(軍官) 및 사수(射手) 60여 인을 이끌고 가면서 내려가는 도중에 군사 4천여 명을 거두워 모았다. 4월 24일 상주(尙州)에 도착했는데, 이일의 생각에 우리 군사가 오합지졸인 만큼 마땅히 습진(習陣)시켜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을 미처 반도 펼치기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별수없이 대진(對陣)하였으나, 교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를 쏘아대 철환(鐵丸)이 비오듯 쏟아졌으므로 아군이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적이 함성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자 우리 군사가 궤멸되면서 사상자가 무더기로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서 이일만 단기(單騎)로 몸을 빼어 달아나고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ㆍ박지(朴篪) 등은 모두 죽었다.





송자대전 제139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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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윤 문열공(尹文烈公) 연시도(延諡圖) 서


신종황제(神宗皇帝)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적이 국경을 침범하므로 임금이 무장(武將) 이일(李鎰)을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윤공 섬(尹公暹)과 박공 지(朴公篪)를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넘어서 방어하도록 하였다. 군사가 상주(尙州)에 막 도착하였을 때 갑자기 왜적을 만났는데,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당해 내지 못하여 이일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갔으나 윤ㆍ박 두 종사관은 피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왕명(王命)을 받고 도적을 토벌하러 왔으니, 우리의 의리를 온전히 하자면 어찌 우리의 몸을 온전히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군막(軍幕) 안에 어엿이 앉아서 움직하지 않다가 마침내 명을 바쳐서 본디 뜻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원근(遠近)에서 의기(義氣)를 분발하여, 제 몸을 온전히 하고 처자(妻子)를 보존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 나머지, 군정(軍丁)으로 징발된 이외에도 유생(儒生)과 백도(白徒 훈련을 거치지 않은 장정들을 말함)가 좌우(左右)로 모여들고 의병(義兵)이 벌 떼처럼 일어나서, 천병(天兵 명 나라 군사)을 도와 중흥(中興)하는 거룩한 공을 이룩하였다.

대저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아 적의 칼날을 꺾고 굳은 진(陣)을 함몰시키면 그 공이 어찌 크지 않으랴마는, 모두가 그 공을 도리어 적다고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저 인(仁)으로써 방패를 삼고 의(義)로써 창을 삼아, 술잔 사이에 절충(折衝)하고 봉인(鋒刃) 앞에 담소(談笑)하면서, 혈기(血氣) 있는 무리들로 하여금 모두 윗사람을 친애하고 그 장(長)을 위해 죽도록 만들어, 나라의 운명이 떨어지지 않고 종사(宗社)가 다시 안정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어찌 ‘죽이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다스리지 않아도 공이 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임금이 원로 대신(元老大臣)에게 공(功)을 논하고 상(賞)을 주도록 명하여, 이공(二公)에게 단서철권(丹書鐵券)을 추사(追賜)하는 한편, 윤공(尹公)에게는 용양군(龍陽君)을 봉(封)하고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였다. 그 뒤 90년이 지난 금상(今上) 병인년(1686, 숙종12)에 ‘문열(文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 증손 이건(以健)을 진산 군수(珍山郡守)로 삼았다. 이부 낭관(吏部郞官) 김창집 여성(金昌集汝成 여성은 자)이 공의 시호를 받들어 진산군에 와서 선포(宣布)하자, 군수가 의물(儀物)을 갖추고 맞이하여 성주(聖主)가 내린 광영(光榮)을 온 세상에 천양하였으니 아, 아름답다.

공의 손자 계(棨)는 병자호란 때에 남양 부사(南陽府使)로서 순절(殉節)하였고, 그의 아들 집(集)은 뜻과 용기를 관철시켜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밝혔으므로 세상에서 한집안의 세 절의(節義)로 일컬었으니, 두 분 손자는 참으로 선대의 업적을 잘 계승했다 이를 만하였고, 공의 풍교(風敎)는 먼 후세까지 미칠 터이니, 그 세도(世道)에 끼친 공로가 어떠하겠는가. 임금이 은명(恩命)을 내려 교리(校理)라는 작명(爵名)으로 바꾸었다. 이부(吏部) 김자진(金自珍)이 그 맏아들 이징(以徵)의 임소(任所) 음성현(陰城縣)에 와서 은명을 선사(宣賜)하여, 조손(祖孫)의 영광이 한없이 빛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이다.’ 하였다. 김 이부(金吏部)가 문정공(文正公) 노선생(老先生)의 문손(聞孫 명망 있는 손자)으로서 두 분의 시호를 반포하러 왔음도 그 기류(氣類)가 은연중에 서로 부합된 것이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었다.

지금 세상에 피음사둔(詖淫邪遁)한 설(說)이 길을 막고 하늘에 닿은 것이 수길(秀吉)과 청정(淸正) 따위의 흉악보다 더 심하다. 성상께서 새로운 명(命)을 특별히 내린 것은, 참으로 백왕(百王)에서 뛰어난 의견이니, 이는 만세토록 영원하기를 빌 만하다. 이번에 군수군(郡守君)이 시호 맞이하던 일을 그림으로 만들어서, 나에게 그 서문을 청하였다.

숭정 기원 후 무진년(1688, 숙종14) 1월 일에 덕은 송시열은 쓴다.






○ 기축년 2월 1일에 나는 특명으로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어 4일에 조정을 하직하였다. 처음에는 6일에 길을 떠나려 했는데, 3일 밤에 심백구 희수(沈伯懼喜壽 백구(伯懼)는 자)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내일 삼사에서 차자를 올려 자네가 떠나는 것을 만류하려 하는 데 그것을 아는가?”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놀라서 조금만 늦으면 반드시 낭패가 되겠다 싶어, 4일에 지레 떠났다. 동문 밖까지 나와서 전송해 주는 친구와 사대부들이 많아 해가 떨어진 뒤에 남벌원(南伐院)에 다다르니, 승정원 서리 수십 명이 모두 말머리에서 절하며 말하기를,

“원컨대, 전별 술잔을 올리겠나이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이리 하느냐?”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승정원에서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은 일찍이 본 일이 없으니, 우리들이 마음으로 적이 탄식하여 감히 이렇게 하나이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도성 문이 닫힐 터이니 너희들은 오래 있을 수 없다. 너희들 중의 우두머리 되는 자가 대표로 잔을 들어 주면 나는 마시리라.”

하고, 말 위에서 두어 잔 마시고 파했다. 사우(士友)들 사이에 이 말을 듣고 아름다운 일로 전한다. 당초 특명이 승정원에 내리니, 늙은 서리 강수천(姜壽千)이 와서 앞에 엎드리면서 문득 눈물을 떨어뜨리기에 내가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를 입어 장차 노모(老母)를 봉양하게 되었으니, 이는 사사로운 기쁨 중의 큰 것인데, 네 어찌 이같이 하느냐?”

하였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공의 말씀은 옳습니다만, 오랫동안 승정원에 있으면서 일찍이 이런 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마음이 동해서 이같이 됩니다…….”

하였다.

내가 함창(咸昌)에 이르러 동헌에 씌어 있는 시를 보니, 김양경(金良鏡)의 절구시가 있었다. 그 끝에,

승지가 일을 말한 때문에 / 以承旨言事

상주 목사가 되었군 / 爲尙州牧使

했는데, 흡사 내 일과 비슷하니, 괴이한 일이다. 양경은 고려 때 재상으로 시를 잘 짓는다는 이름이 났다 한다. 그의 시에,

어찌 하늘 향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랴 / 豈向蒼蒼有怨情

귀양 와서도 오히려 한 고을을 다스리네 / 謫來猶自得專城

어느 때나 영각에서 황각에 올라 / 何時鈴閣登黃閣

태수로서 재상이 되어 가리 / 太守行爲宰相行

하였는데, 뒤에 과연 재상이 되니, 사람들은 시참(詩讖)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원정(怨情)’이란 두 글자는 반드시 마음속의 생각을 표현한 말이고, ‘황각(黃閣)’ㆍ‘재상(宰相)’이란 말은 더욱 희망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니, 군자가 마음을 평탄히 갖고 이치에 순히 하는 도리로는 아마 이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과 지금 사람의 일이 우연히 서로 부합되기 때문에 나의 글솜씨가 졸한 것을 따지지 않고 여기에 화답하였다.

성주께서 신의 까마귀 반포하는 정을 알아 / 聖主知臣烏鳥情

특별히 한 고을을 내주어 봉양하라 했네 / 洪恩特許養專城

상산(상주의 옛 이름)에 내일 관청 일이 파하면 / 商山明日新衙罷

문소로 빨리 가서 어머님을 모시리 / 將母聞韶敢緩行

그 뒤에 《동인시화(東人詩話)》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니, 모두 김양경의 시가 실려 있었다.

상주는 성이 몹시 허물어져서 조정에서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쌓을 것을 결심하고 온 고을을 모조리 8결(結)로 나누어 8결을 1부(夫)로 삼아, 1부에게 너비 두어 자씩 맡겨서 그 옛터대로 쌓도록 하여 열흘이 채 못 되어 공사가 끝났던 것이니, 이는 신묘년(1591, 선조 24) 봄의 일이다.

임진년(1592, 선조 25) 여름. 왜적이 크게 이르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서울에서 변고를 듣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으나 고을 사람들이 이미 흩어져서 성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북쪽 냇가에 나가 진을 치고 적과 교전했으나 크게 패하여 주성(州城)이 드디어 적에게 점령되었는데, 계사년 여름에 비로소 적이 물러났다. 내가 전에 고을에 간직된 옛 문서를 상고해 보았더니, “공민왕(恭愍王) 말년에 왜적이 본주를 불태워 함락시켜서 성이 모두 무너졌던 것을 안성(安省)이 판관으로 있을 때 다시 쌓았다.”하였다. 그런 지 2백 년 뒤에 내가 새로 쌓았는데, 겨우 1년 만에 적에게 함락되고 말았으니, 원통하고 또 원통한 일이다.

본주의 돈과 곡식을 윤상중(尹尙中) 목사 이전에는 중기(重紀 사무 인계 때 전하는 문서)가 없고, 경진년(1580, 선조 13)에 서애(西厓)가 목사가 된 이후로 비로소 중기(重紀)가 있기 시작했다. 서애가 덕순(德純)에게 전한 것이 18만이었고, 덕순이 만기가 되자 공원(公遠)에게 전한 것이 23만이었으며, 공원이 4년 만에 병으로 체직되자 나에게 전한 것이 25만이었다.

내가 3년 만에 만기가 되어 사회(士晦)에게 전한 것이 27만이었으니, 창고의 풍부함이 도내에서 제일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모두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적이 물러난 뒤에도 오히려 몇만 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 내가 상주를 다스린 지 3년 동안 온 집안의 위아래가 아무런 병 없이 늙은 부모를 극진히 봉양해서 명절이나 좋은 때든 혹 그런 때가 아니라도 잔치를 벌여 즐겼으니, 망극한 임금의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었다. 난리(임진왜란을 말함) 후에 다시 이곳을 지나가니, 노래하던 집이나 춤추던 누각이 모두 여우나 토끼의 굴이 되었으니, 마음이 상하고 보기 참혹함을 어떻게 이루 형용하겠는가. 높은 것이 극에 달하면 무너지는 것이 비록 이치의 당연함이라고는 하지만, 뜻밖에 재앙을 당하게 되니 하늘이 차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고 눈을 닦고 기다렸건만, 요망스러운 기운을 쓸어내지 못하니, 통곡한들 무엇하랴.

○ 신묘년(1591, 선조 24) 가을. 나는 상주 목사에서 갈린 지 얼마 안 되어 공저(公著 이성중(李誠中)의 자)를 대신하여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되었다.

대궐에 나가 하직하던 날 임금이 명하여 편전(便殿)에서 인견하였다. 겨우 자리를 정하고 앉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잘 있었는가? 상주를 정성껏 다스렸다고 하니, 대단히 기쁘오.”

하므로 나는 임금의 말씀을 듣자 감격하여 눈물이 저절로 흘러서 자리를 피하면서 사례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이어서 또 묻기를,

“그 고을 인심과 풍속이 어떠하였소?”

하시기에 나는, ‘진실로 아름다웠다.’고 대답했다. 임금이 또 묻기를,

“그 지방 인재가 어떠하였소?”

하시기에 나는, ‘그 고을 습속이 글을 숭상해서 공(功)과 학(學)에 흥기하는 자가 많다.’고 대답했다. 또 묻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네가 그 고을에서 인재를 얻었느냐?” 《논어》〈옹야편(雍也篇)에 보임 고 하였으니, 여기에 대해서 말해 보라.”

하시기에 나는,

“진사 정국성(鄭國成)은 노성하고 효행이 있으며, 유학 윤진(尹瑱)도 효행이 있었습니다.”

하였더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조에서는 어찌 이들을 수용(收用)하지 않느냐?”

하였다. 이때 승지 조인득(趙仁得)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에게 “잊지 말고 거행하라.”하였다. 또 묻기를,

“백성들이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 무엇이었소?”

하므로 대답하기를,

“그 고을은 땅이 넓고 백성이 많아, 부역에는 조그만 고을처럼 고생을 하지는 않지만,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들도 다 같은 백성들인데, 시초(柴草)의 공물이 과중함을 고통으로 여겨 더러는 이 지방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자도 있습니다.”

하였다. 자리가 파할 무렵에 상이 이르기를,

“방백(方伯)으로서 할 책임이 교서 속에 다 씌어 있으니, 정성을 다해서 봉직하오.”

하고 또 ‘잘 가오.’라고 분부하였다. 이런 지 얼마 안 되어, 정국성(鄭國成)은 목청전 참봉(穆淸展參奉)이 되었고, 윤진(尹瑱)은 제릉 참봉(齊陵參奉)이 되었다. 그러나 정국성(鄭國成)은 늙었다고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이날 경립(敬立)이 사관(史官)으로 입시(入侍)하여 부자가 함께 임금 앞에 나아갔으니,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어서 황공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지난해로 말하면, 의립(義立)은 과거에 올라 사관이 되고, 경립은 옥당에 들어갔으며, 나는 또 비변 당상(備邊堂上)으로 있게 되어 혹 인견할 때나 또는 경연에서 특진관(特進官)의 강(講)이 있을 때에는 3부자가 함께 입시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영화스럽고 경사로움이 분수에 넘어 황송하고 민망한 마음이 지난 신묘년 때보다 몇 배나 더했다. 아이들이 성대하고 가득찬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늙은 아비와 같다면 끝까지 복을 누리는 데에 거의 도움이 될 것이다.

○ 아조(我朝)의 종계 악명(宗系惡名)을 변무(辨誣)하는 주청에 관해서는 조종조(祖宗朝)부터 사신을 보내서 여러 차례 중국 황제에게 주달했으나, 성상(聖上) 대에 이르러 비로소 황제의 승낙을 얻어 2백 년 동안의 억울함이 시원히 씻어졌으니, 온 나라의 경사스럽고 다행함이 어떻겠는가. 상이 전후 사신들의 공을 의논하여 광국(光國)이란 호를 내렸으니, 이는 무자년(1588, 선조 21)의 일이다.

조정에서는 임금의 성효(聖孝)와 지극한 덕을 형용할 길이 없어 휘호(徽號)를 올리고자 대신들이 힘껏 청했으나, 상은 완강히 거절하고 겸손한 덕을 지켰다. 나는 이때 부제학으로 있었는데 어느날 주연(晝筵)에서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휘호를 올리기를 청하는 것은 실로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 옛날 당 나라나 송 나라 때에 허례를 숭상하던 일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굳이 사양하시고 받지 않으시는 것은 지극히 겸손한 덕에서 나온 처사이시오니, 그 거룩하고 아름다움이 도리어 휘호를 받으시는 것보다 빛이 납니다. 성상의 마음이 곧 요순(堯舜)의 마음이신 것에 깊이 탄복합니다. 여러 신하들의 계사(啓辭)에, 방훈(放勳 요(堯) 임금)이나 중화(重華 순(舜) 임금)로 존호를 삼는다 하였는데, 이는 사관들이 추술(追述)한 것이고 존호는 아니옵니다. 이것을 끌어다 같이 하려고 한다면 이는 너무도 억지인 것입니다. 전모(典謨)의 문자를 사실대로 인용하지 않음이 이와 같다면 그 폐단이 말할 수 없게 될 것이오니, 몹시 옳지 못한 일이옵니다.”

했다. 기축년간에 조정에서 다시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했는데, 헌납 백유함(白惟咸)이 독계(獨啓)하기를,

“존호를 청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감히 백관들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조정에서 청한 것이 윤허를 받게 되어 ‘정륜입극 성덕홍렬(正倫立極成德洪烈)’이란 존호를 올렸다.

금년 7월에 임금이 비변사의 여러 당상들을 인견할 때 나도 입시하게 되었다. 그날 임금의 얼굴은 온화하고 말소리는 명랑했다. 그래서 적의 정세를 논하는 데도 응대하는 것이 분명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각각 포부를 말하라고 재삼 하교하시어, 엎드려 듣고 감격하여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난리가 있은 뒤에도 존호를 그대로 쓰는 것은 변고를 만나면 몸을 낮추는 도리에 벗어남이 된다.’고 여겨 매양 아뢰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여 감히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다. 이날은 군신(君臣) 사이에 마음이 서로 통하여 마치 한집안의 부자간과 같으니, 어찌 감히 생각하는 바를 아뢰지 않아서 성교(聖敎)를 저버릴 수가 있으랴. 마침내 아뢰기를,

“신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 감히 아뢰고자 합니다. 존호는 당초에 상께서 사양하고 받지 않으시므로 신이 진실로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복종하여 ‘요순 같은 성군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에 전하께서 조정의 청을 받아들이신 것은 필경 마지못해서인 것으로 아옵니다. 지금은 변란을 겪은 뒤라, 몸을 조심하여 수행하는 일이 지극하지 않으신 것이 없사온데, 유독 이 존호만은 그대로 쓰시니, 스스로 몸을 낮추시는 도에 미진한 바가 있습니다. 대신들이 좌중에 있으니 물어보시어 존호를 버리신다면 천지 신명에게 경계하고 두려워하시는 뜻을 보여주심이 적지 않을 것이니, 위로 종묘사직에 고하고 아래로 사방에 교서를 반포하시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하였더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일찍이 그런 뜻이 있었으나, 결행하지 못했는데, 경이 지금 말하니 참으로 충신이로다. 내 당장 존호를 버리리라.”

하므로, 나는 감격해서 일어나 절을 했다.

수찬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신도 아뢰려 하였으나 소관(小官)이옵기로 감히 아뢰지 못했는데, 윤모(尹某)가 아뢰자, 전하께서 충신이라고 칭찬까지 하시오니 누군들 감격하지 않으오리까…….”

하였다. 내가 아뢴 말은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는 없고 그 큰 줄거리만 따서 적는 바이다.

이튿날 대신들이 계사를 올렸는데, 어떤 이는 “이것은 오늘날 말할 것이 아니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당 나라 때는 사세가 급박해서 자신을 허물하는 조서(詔書)를 천하에 반포하여 강한 장수들의 마음을 진압해 복종시키려고 소장(疏章)에도 신성문무(神聖文武)란 호를 말하지 못하게 한 것이니, 이는 일시의 우연한 거조였다.……”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며칠 동안에 대신들이 4~5차례나 아뢰자, 좌상이 조정에서 또한 힘써 아뢰기를,

“신 등이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이것을 봉행(奉行)하지 못하게 하겠나이다.……”

해서, 이로 인하여 중지되었다.

내가 계달(啓達)하던 날에 비망기를 내렸는데, 대강의 내용은,

“오늘 다행히 등에 찔린 가시는 빼냈으나, 바늘 방석에 앉는 것은 언제나 면하려나. 존호를 삭제하는 일은 예관으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고 교서를 반포하도록 하라. 존호는 마땅히 중국 조정에는 숨겨야 하므로 중국 장수가 서울에 있으니 할 수 없고, 종묘에 고하는 일 역시 참작해서 하라.”

하였다. 삼공(三公)의 계사에 전후 비답한 것은 이러하다.

“내가 서토(西土 관서 지방)에 있을 때부터 이것을 면하기를 빌었어도 얻지 못했는데 이제 다행히 말이 나왔으니, 실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일이다. 이 일이 실로 아무런 유익함도 없이 죄인의 몸에 그대로 씌워진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으랴. 전교대로 지체하지 말고 속히 삭제하고 종묘에 고하는 것이 좋겠소. 교서를 반포하는 일은 참작해서 지휘하오.”

하고, 또 이르기를,

“이렇게 분분하게 끌지 말고 속히 거행할 뿐이니, 행하기 어려운 아무런 곡절도 없는 일이오.”

하고, 또 이르기를,

“이 일은 이대로 두어도 유익함이 없고, 없애기도 어렵지 않으므로 속히 행할 뿐이니, 마땅히 번거롭게 말하지 마오.”

하고, 또,

“이 일은 결코 그대로 둘 수 없고 명령도 이미 내렸으므로 하루라도 지체할 수 없으니, 다시는 말하지 마오.”

하였다.-문소만록(聞韶漫錄)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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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만록(聞韶漫錄)


판서 윤국형(尹國馨) 저






 동명집 제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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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갈(碑碣)

좌참찬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이공의 신도비〔左參贊贈領議政李公神道碑〕


한산인(韓山人) 수부 원외랑(水部員外郞) 이선(李䆄)이 할아버지의 묘명(墓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증(增)이고, 자는 가겸(可謙)이며, 호는 북애(北崖)이다. 가정(嘉靖) 을유년(1525, 중종20)에 태어나 25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으며, 36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다가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었다.

이력을 고찰해 보면, 육조에서는 호조ㆍ병조ㆍ형조ㆍ예조ㆍ이조의 낭관을 지냈고,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에서는 정자ㆍ박사ㆍ수찬ㆍ교리를 지냈으며, 헌부에서는 지평을 지내었고, 간원에서는 정언ㆍ헌납을 지냈다. 외임으로는 함경도 북평사(咸鏡道北評事)와 경기 도사(京畿都事)를 지냈다. 사명(使命)을 받든 것은 무진년(1568, 선조1)에 명나라 사신이 나올 때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경진년(1580, 선조13)에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경사(京師)에 갔다.

계유년(1573)에는 하루에 여섯 번이나 옮겨져 이조 정랑으로부터 검상ㆍ사인ㆍ집의ㆍ전한(典翰)ㆍ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이르렀으며, 자급(資級)이 뛰어올라 통정대부가 되었다. 통정대부로 있을 때에는 내직으로는 병조ㆍ호조ㆍ형조의 참의와 판결사(判決事), 도승지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황해ㆍ충청ㆍ전라ㆍ경상 네 도의 관찰사를 지냈는데, 경상도의 경우에는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였다.

을유년(1585)에는 자급이 뛰어올라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으며, 뒤에 또다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뛰어올랐다. 가선대부와 가의대부로 있을 때에는 형조ㆍ예조ㆍ이조의 참판, 한성부의 좌윤과 우윤, 부제학, 대사헌, 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기축년(1589)에는 간원(諫院)의 장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국문(鞫問)하는 데 참여하면서 평번(平反)하기를 힘썼으므로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였다. 경인년(1590)에는 공으로 인해 평난 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훈되었으며, 아천군(鵝川君)에 봉해졌다.

신묘년(1591) 겨울에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자급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뛰어올랐고, 나중에 또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뛰어올랐다. 자헌대부와 정헌대부로 있을 때에는 형조ㆍ예조ㆍ공조의 판서, 의정부의 좌참찬과 우참찬을 역임하였다. 계사년(1593)에는 막 큰 난리를 겪어 나랏일이 새로 시작되었다, 이때 공은 예조 판서로 있었는데, 헌장(憲章)과 예의(禮儀)가 찬란하여 볼만한 것이 있었다.

경자년(1600) 10월에 졸하니, 춘추가 76세였다. 부음을 아뢰자 상께서 몹시 애도하면서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난리가 나기 이전에 시행하던 예장(禮葬)의 제도를 다시 쓰라고 명하고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아천부원군(鵝川府院君)을 추증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34) 2월에 광주(廣州) 돌마리(突馬里)에 장사 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신라(新羅)의 원훈(元勳)인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사직(司直) 이몽원(李夢黿)의 딸이다. 시부모 섬기기를 효성으로써 하였으며, 친척들 대우하기를 은혜로써 하였다. 자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엄하면서도 법도가 있었다. 공보다 13년 뒤인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졸하니, 춘추가 82세였으며, 공의 묘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정직하여 아부하지 않았다. 홍문관 정자로 있을 적에는 권간(權奸)의 뜻을 거슬렀다가 북막(北幕)으로 좌천되었다. 성품이 또 청렴하고 검소하여 가산(家産)을 일구지 않았다. 지위가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었는데도 자신의 생활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효우의 성품을 타고났으며 생일날에는 잔치를 베풀지 않았고 새로 난 먹을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백씨(伯氏)인 전부공(典簿公 이원(李垣))이 먹은 다음에야 먹었다. 제매(弟妹) 가운데 궁핍한 자들은 모두 공에게 의지해 지냈다. 붕우들의 상을 당하면 반드시 소식(素食)을 하였는데, 늙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공은 젊어서는 문명(文名)으로 자부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제수될 때에는 반드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중국 사신이 오면 빈상(儐相)을 따라가 일을 보는 사람은, 당시에 문사(文士)들이 매우 많았는데도 모두 공을 적임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이것으로 스스로 자랑하지 않았다. 세 차례나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출사(出仕)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국자(國子)의 사유(師儒)는 얕은 학문을 가진 나와 같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하였는데, 식자들이 그 겸손한 태도를 훌륭하게 여겼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동료 관원들이 무함을 당하였는데, 이를 구원하는 자들은 배척을 당하였으므로, 비록 마음속으로 그들의 원통함에 대해 아는 자라고 하더라도 두려워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당시에 공의 아들 경함(慶涵)이 장령으로 있으면서 공에게 거취에 대해 묻자, 숨기지 말고 직언하라고 면려하여 화의 기미가 조금 멈추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 7년 전쯤에 왜적들의 형세가 아주 치성하였는데, 조헌(趙憲)이 상소를 올려 왜적들을 제압하는 방책을 진달하면서 성혼(成渾), 박순(朴淳), 홍성민(洪聖民), 이준민(李俊民)과 다른 몇몇 사람을 불러들여서 미리 계책을 강구하여 후환에 대비하기를 청하였는데, 공의 이름도 들어 있었으니, 한 시대에 중시되어 나라의 안위가 공의 몸에 매여 있음이 이와 같았다.

공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7대손이다. 아버지의 휘는 지숙(之菽)으로, 종묘서 영(宗廟署令)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질(秩)로, 한성군(韓城君)에 봉해졌다. 증조의 휘는 장윤(長潤)으로,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고조의 휘는 우(堣)로 대사성을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상은 모두 공이 공신에 책봉됨으로 해서 추증된 것이다. 어머니는 선산 김씨(善山金氏)로, 진사 김필신(金弼臣)의 딸이다.

공은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경홍(慶洪)은 생원이고, 차남 경함(慶涵)은 참판이고, 삼남 경심(慶深)은 통제사(統制使)이고, 사남 경류(慶流)는 병조 좌랑이고, 오남 경황(慶滉)은 군수이다. 장녀는 판관(判官) 유인(柳訒)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현감 이계(李繼)에게 시집갔다.

경홍은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확(穫)은 현감이고, 장녀는 생원 박유부(朴由孚)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사 송희득(宋希得)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좌윤 김수현(金守玄)에게 시집갔다. 경함은 자식이 없어서 동생인 경황의 아들 선(䆄)을 후사로 삼았다. 경심은 1녀를 두었는데, 부사(府使) 이지정(李志定)에게 시집갔다. 경류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제(穧)는 문과에 급제하여 통정대부로 대구 부사(大丘府使)이며, 장녀는 별좌(別坐) 권영(權偀)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목사 김효성(金孝誠)에게 시집갔다. 경황은 3남 6녀를 두었는데, 장남 복(穙)은 유학(幼學)이고, 차남 선(䆄)은 문과에 급제하여 수부랑(水部郞)이고, 삼남 환()은 유학이며, 장녀는 진사 신대업(申大業)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생원 이시형(李時烱)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현감 유득증(兪得曾)에게 시집갔고, 사녀는 현령 안응창(安應昌)에게 시집갔고, 오녀는 유학 신유(申柔)에게 시집갔고, 육녀는 진사 조문형(趙文馨)에게 시집갔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모두 320여 명이니, 역시 성대하기도 하다. 그 가운데 드러난 자로는 대구 부사의 아들 정기(廷夔)가 장원(壯元)으로 발탁되어 현재 대사간으로 있다.

임진년의 왜란 때 대구 부사의 아버지인 좌랑공(佐郞公)이 순변사(巡邊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던 중 상주(尙州)에서 전사하였다. 대가(大駕)가 마침내 서쪽으로 행행하게 되었을 때 백료들 가운데 뒤처진 자가 많았는데, 공은 말을 달리다가 고양(高陽)에 이르러서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서럽게 울다가 기절하였으므로 역시 뒤처지게 되었다. 이에 매번 뒤늦게 따라간 것을 한스러워 하였는데, 서쪽을 바라보면 반드시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가을 사이에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정기(廷夔)는 사로(仕路)에서 아주 현달하였는바, 어찌 하늘이 충렬이 있는 사람에게 이런 보답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목은공의 뒤를 이은 그 후예들은 / 牧隱之後

대를 이어 아름다운 명성 있었네 / 世有令名

칠대 후손 태어나게 될 때에 미쳐 / 逮于七葉

빼어나신 북애공이 태어났다네 / 北崖挺生

아름답고 아름답다 북애공이여 / 猗歟北崖

실로 나라 버티게 할 기둥이었네 / 實邦之楨

조정에서 아름다운 풍모 날리매 / 羽儀王廷

크게 이름 드러나고 영예로웠네 / 極顯極榮

세 차례나 사양하며 안 받았거니 / 三讓不受

그 직책은 대사성의 자리였다네 / 職大司成

사양함이 마음속서 우러났거니 / 讓出中心

주역 겸괘 그 울림을 잘 얻었다네 / 得謙之鳴

큰 시내를 건너기에 이로웠거니 / 利涉大川

그건 실로 겸손해서 누린 거였네 / 實惟謙享

수명 보면 칠십육 세 장수 누렸고 / 壽七十六

지위 보면 정경 자리 올라갔다네 / 位躋正卿

다섯 명의 헌헌장부 아들 뒀거니 / 子五丈夫

성대함은 비길 만한 사람이 없네 / 盛莫與京

많은 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던가 / 不其多福

귀신 본디 가득한 걸 싫어한다네 / 鬼神害盈

돌마리의 마을 곁에 언덕 있거니 / 突馬之原

그곳 바로 공의 선영 있는 곳이네 / 是公先塋

내가 이에 신도비명 얽어 지어서 / 刻此墓碑

영원토록 그 명성을 드리우노라 / 永垂厥聲


[주D-001]수부 원외랑(水部員外郞) : 수부는 공조를 가리키고, 원외랑은 좌랑을 가리킨다. 이선은 공조 좌랑을 지냈다.

[주D-002]갑오년에 …… 멈추었다 : 1594년에 정철(鄭澈)을 삭직(削職)하라는 논의가 일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이때 이경함은 장령으로 있으면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그 부당성에 대해 과감하게 상소하였다.

[주D-003]주역 …… 얻었다네 : 《주역》 〈겸괘(謙卦) 육이(六二)〉에 이르기를 “육이는 겸손함을 울림이니, 정하고 길하다.〔六二 鳴謙 貞吉〕” 하였다.

[주D-004]큰 …… 이로웠거니 : 어려운 세상을 잘 헤쳐 나갔다는 뜻이다. 《주역》 〈수괘(需卦)〉에 이르기를 “곧아야만 길하다. 큰 시내를 건넘에 이롭다.〔貞吉 利涉大川〕” 하였다.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7일(병오) 1번째기사

변보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일을 순변사로 보냈으나 패배하다      

포시(晡時)에 변보(邊報)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일(李鎰)로 순변사(巡邊使)를 삼아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尙州)에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종사관 박호(朴箎)·윤섬(尹暹) 등은 다 전사하고 이일은 단기(單騎)로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1장 A면

【영인본】 21책 483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軍事)




○ 25일에 적이 상주(尙州)를 함락시키자 순변사 이일(李鎰)이 달아나 충주로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교리(校理) 윤섬(尹暹)ㆍ박지(朴箎)와 방어사의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ㆍ판관 권정길(權井吉)이 죽고, 조방장 변기(邊璣)도 죽었다.

○ 당초에 이일(李鎰)이 서울 정예병 3백 명을 거느리고 가려고 병조에서 선발해 놓은 병안(兵案)을 가져다 보니 여염 시정(市井)의 백도(白徒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장정들)ㆍ서리(胥吏)ㆍ유생들이 반을 차지했다. 임시 점고하니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詩卷)을 가지고서, 아전들은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병역을 면하고자 하소하는 자가 뜰에 꽉 차서 보낼 사람이 없었다. 이일이 3일이나 못 떠나고 있다가 하는 수 없이 이일만 먼저 출발하고 별장(別將) 유옥(兪沃)이 나중에 거느리고 가도록 하였다. 《징비록》

○ 21일에 이일이 문경(聞慶)에 이르러 급히 장계했는데, “오늘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 감히 당할 사람이 없으니 신은 죽음을 각오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기재잡기》

○ 처음에 경상도 수령들이 군사를 이끌고 대구(大丘)로 가서 냇가에서 노숙(露宿)하며 순변사를 기다린 지 이미 수일 되었다. 적의 소식이 점점 가까워지자 군사들은 스스로 서로 놀라고 요동하였다. 그때 큰 비가 내려 옷은 젖고 군량은 떨어지니 밤중에 다 흩어져버려 수령들도 모두 홀로 말을 타고 분주히 돌아갔다. 이일이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산중으로 도망했고, 판관 권정길(權井吉)만 혼자 있었다. 이일이 군사가 없음을 책망하여 그를 베려 하다가 용서하고 군사를 모으게 했다. 이일이 또 창고문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며 흩어진 백성들을 달래어 모이도록 해서 수백 명을 얻어 군대를 편성했다. 저녁에 개령(開寧) 사람이 와서 적이 왔다고 알렸다.

이일이 여러 사람을 의혹시킨다고 죽이려 하니 그 사람이 형에 임박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며, “우선 나를 가두어 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적이 안 오거든 죽여도 늦지 않다.”고 해도 이일이 듣지 않았다. 그날 밤에 적이 선산에서 진군해 와서 이미 남면 20리 되는 장천리(長川里)에 진을 쳤는데, 이일의 군사는 척후병이 없으므로 그것도 알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 적의 척후병이 두셋씩 짝을 지어 북천(北川)의 이일의 진 앞에 와서 오랫동안 바라보고 수차나 갔다왔다 했으되 군중에서 감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이일이 적의 포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성밖에 진을 치고 그 군사와 백성 8, 9백 명으로 북천 가에서 훈련했다.

○ 이달 25일에 성안을 바라보니 두어 군데 연기가 일어났다. 군관을 시켜 알아보고 오게 했는데, 적이 다리 밑에 잠복해 있다가 조총으로 군관을 쏘아 머리를 베어갔다. 우리 군사들이 이것을 바라보고 기가 죽었다. 얼마 안 있어 적이 몰려와서 조총으로 공격하니 맞은 자는 즉시 죽고, 우리 군사가 활을 쏜 것은 수십보쯤 가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적은 이미 좌우로 나누어 포위해 왔다. 이일은 말을 달려 북쪽으로 달아나고 종사관 윤섬ㆍ박지 교리ㆍ판관 권정길은 모두 죽었다. 《조야기문》 《징비록》

○ 이때 적은 무릎으로 기어 전진하여 잠깐 동안에 벌판을 덮었다. 우리 군사는 놀라 흩어지고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였다. 《일월록》

○ 처음에 이일이 윤섬의 친구 한 사람을 종사관으로 삼았는데 윤섬이 이일에게 가서 말하기를, “그 사람은 홀어머니가 계시고 다른 형제가 없어 그 어머니가 밤낮으로 울고 있으니 공은 잘 생각해 주시오.” 하니 이일이 허락하면서, “국가의 존망이 장차 여기에서 결판날 것이니 종사관은 아주 잘 골라야 할 터인데 그대보다 나을 사람이 없겠네.” 하고 데리고 가려 하였다. 섬이 그 어머니에게 들어가 하직하니 어머니가 울면서 말하기를, “너는 어째서 우리 둘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죽을 땅에 가느냐.” 하였다. 윤섬이 대답하기를,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부모의 은혜와 나라에 대한 의(義)를 다 온전하게 할 수 없으며, 또 집에는 동생이 있으니 어머니를 모실 것입니다.” 하였다.

동생 윤탕(尹逿)이 손을 잡고 울면서, “형은 어찌 친구만 생각하고 부모는 잊어버린 듯이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오?” 하니 윤섬이, “그는 형제도 없어 형편이 가긍하지만 우리 집은 네가 있을 뿐 아니라, 또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어찌 사정(私情)을 돌아보겠느냐.” 하였다. 상주 북쪽 가마소[甑淵] 위에 이르렀을 때 적군이 졸지에 닥쳤다. 이일이 달아나면서 윤섬에게, “헛되게 죽기만 하는 것은 쓸 데 없으니 나를 따르라.” 하니 윤섬이 대답하기를, “장차 임금을 뵈올 수 없다.” 하고 박지와 함께 죽었다. 윤섬의 행장

○ 박지는 김수의 사위이므로 이일이 김수의 도움이 있을까 해서 수행하기를 청했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일월록》 ○ 박지는 18세에 장원하였다.

○ 적군이 이일을 급박히 추격해 오자 이일이 말을 버리고 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나 문경에 이르러 급히 장계하고 죄를 기다리다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새재를 버리고 신립의 군중으로 갔다. 《징비록》

○ 21일에 이일의 패보가 왔다. 궁중에서도 역시 굳은 뜻을 갖지 못하고 드디어 미투리[繩鞋] 등 멀리 갈 행구(行具)를 사들이고, 또 사복시(司僕寺)에 명해서 영강문(永康門) 안에 말을 대기하게 하였다. 《기재잡기》-연려실기술





국조보감 제80권  원문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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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조조 5

32년(임진, 1832)


○ 2월. 지난 겨울에 예조 참판 조인영(趙寅永)이 호서 지방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갔다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이번 봄이 되거든 충주 달천(達川)의 싸움터에서 고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 고 종사 (從事) 김여물(金汝岉) 및 함께 순사(殉死)한 여러 장사(將士)의들에 대해 치제하소서.”하니, 이에 따르고 목사 이종장(李宗張)에게도 마찬가지로 사제(賜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금년을 당하여 옛일을 생각하니, 국난에 목숨을 바쳐서 공을 세운 신하들의 충성과 노고 또한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충렬공 고경명(高敬命), 충무공 이순신이 순절한 곳에는 같이 순국한 장사들과 함께 제단을 설치하고 치제할 것이며, 두 충렬공 및 문열공의 봉사손(奉祠孫)은 거두어 임용하도록 하라.

문충공 이항복,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 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 문충공 유성룡,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의 집에는 승지를 보내어 사제(賜祭)하되, 시골에 있는 사판(祠版)에 대해서는 도내의 수령으로 전에 승지를 지낸 자를 제관에 차임하도록 하라.

전후 8년 간에 걸쳐 충성과 절개를 바친 자들이 그 수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마는, 예란 번거로우면 도리어 잗달게 되므로, 이제 그 중에서 가장 뚜렷한 자를 들어서 시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추모하여 잊지 못한다는 뜻이 실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어찌 제사를 지내주고 안 지내주고 한다 하여 차이가 있겠는가.”

하였다. 또 상주(尙州) 증연(甑淵)의 세 종사(從事)가 순절한 곳에도 마찬가지로 사제(賜祭)를 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선무사(宣武祠)와 정동관군사(征東官軍祠)에 치제하고, 관서의 도백을 보내어 평양의 무열사(武烈祠)에 치제하였다.

○ 울산(蔚山)의 고 부장(部將) 이응춘(李應春)과 그 아들 이승금(李承金)에게 모두 추증의 은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임진년에 이응춘은 전사했고, 이승금은 전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 3월.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묘우(廟宇)를 세운 구갑(舊甲)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동묘(東廟)에는 장신(將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고, 남원(南原) 강진(康津)의 무안왕묘(武安王廟)에는 병사와 수사를 나누어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 4월. 졸(卒)한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組淳)에게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성복일(成服日)에 창경궁 금청교(禁淸橋)에 친히 나아가 발상하였으며, 친히 글을 지어 승지를 보내 치제하였다. 죽음을 슬퍼하는 하교를 내리기를,

“기억하건대, 지난 경신년(1800, 정조 24)에 영고(寧考)께서 나 소자의 손을 잡고 이르시기를, ‘이제 내가 너를 이 신하에게 맡긴다. 이 신하가 기필코 그릇된 도리로 너를 보필하지는 않을 것이니, 너는 그렇게 알아라.’ 하였다. 보위를 이은 지 30여년 동안 그에게 중임을 맡긴 것은 비단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오직 충성스럽고 곧은 성품으로 힘써 일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실만을 위하여, 안으로는 지극한 정성으로 능력을 다하여 나를 바른 길로 보필하고, 밖으로는 국무(國務)를 통섭(統攝)하여 나라를 안정시켜 시국의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였으니, 국가를 보전하여 오늘날이 있게 한 것이 그 누구의 힘이라 하겠는가? 참으로 선왕께서 부탁하신 성의(聖意)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다. 나의 애통함은 차치하더라도 나라일을 장차 누구에게 의뢰한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마치 물을 건너다가 노를 잃은 것 같다.”

하였다.

○ 안주(安州)의 민가에 불이 나서 4백 호를 연소(延燒)시켰다. 용강(龍岡) 현령 서염순 (徐念淳)에게 명하여 달려가서 위유하게 하고, 이어서 이재민의 신역(身役)을 감면해 주고 신역이 없는 자에게는 곡물을 지급해 주도록 명하고 도신에게 지시하여 집을 지어 주거를 정해 살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게 하였다.

○ 7월. 큰 홍수가 났다. 상이 이를 걱정하여 스스로를 꾸짖고 감선하였으며, 각신(閣臣)을 보내어 기청제(祈請祭)를 지냈다.

의금부와 형조의 당상에게 명하여 대신과 의논해서 각 도의 도류안(徒流案) 중에 방면에 합당한 자를 부표(付標)해서 들이게 했다. 또 경외의 죄수를 심리하여 특별히 소결(疏決)하는 조치를 내렸는데, 사면받은 자가 수백 인이었다. 부관(部官)을 나누어 보내어 무너지거나 떠내려 간 가호를 두루 조사해서 구제조치를 더욱 후하게 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시체는 묻어주고 익사하거나 압사한 자들에 대해서는 더욱 각별히 보살펴 주었으며, 이어서 재해를 입은 각 도에 지시하여 이에 따라 행하게 하였다.

○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입묘례(入廟禮)가 이루어졌다. 묘호를 문호(文祜)라 하였다.

○ 경희궁(慶熙宮)에 이어(移御)하였다. 판중추부사 이상황(李相璜)이 아뢰기를,

“이 대궐은 곧 영조 임금께서 오랫동안 계시던 곳으로 오래오래 사시면서 사람들을 진작시키셨던 그 큰 교화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이 남아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에 사모하는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고 그 공업을 계승하고 싶은 생각이 더욱 절실해지실 것입니다. 전하께서 본받아 조술(祖述)하실 바가 진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기대하여 권면함이 절실하니 감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상황이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거둥길에서 세손의 모습을 우러러 보았더니, 뛰어난 풍채와 자질이 엄연하기가 마치 타고난 것인 듯하였는데, 길가의 부녀자와 아이들이 춤추고 기뻐하며 축하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세손의 자질이 이같이 숙성하셨으니, 강학(講學)도 때를 맞추어 하는 것이 더욱 귀한 것입니다. 날씨가 선선해지거던 주연(冑筵)을 열어서 교육하는 방도를 다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아룀은 충애(忠愛)에서 나온 것이다. 뒤에 의당 하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 9월. 목릉(穆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올리고, 이어서 건원릉(建元陵)과 원릉(元陵)에 나아가 전알하였다. 상이 거둥길에 농사가 흉년이 든 것을 보고 놀라서 이르기를,

“하나를 보면 셋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니 전국이 어떻다는 것을 알 만하다. 구제하는 정사를 어찌 규정에만 매달리겠는가. 경기 고을에 명하여 재해를 입은 밭에 대하여 특별히 세금을 감면하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 왕세손이 사(師)와 빈객에 대한 상견례를 행하고 경현당(景顯堂)에서 개강(開講)하였다. 하교하기를,

“어린 세손이 개강을 하였으니 나의 기쁨을 무어라 형언할 길이 없다.”

하고, 사와 빈객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경기ㆍ해서(海西)ㆍ호서(湖西)에 기근이 들었다. 관서의 쌀 2만 5천 곡, 호남의 곡식 3만 곡, 영남의 쌀 1만 5천 곡을 경기로 옮기고, 관서의 좁쌀 4천 곡과 호남의 곡식 5천 곡을 해서로 옮겨서,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내탕고의 은자(銀子) 2천 5백 냥, 다목[丹木] 4천 8백 근, 백반 1천 3백근을 특별히 내려서 경기ㆍ호서ㆍ해서 및 사도(四都)에 나누어 주었다. 도신과 수신(守臣)에게 하유하기를,

“저 농사를 망치고 생업을 잃은 불쌍한 백성들이여! 장차 어떻게 입고 먹을 것인가. 비단옷이 몸에 따뜻할 땐 백성들의 입을 것 없는 고통을 생각하고, 쌀밥이 입에 맞을 땐 백성들의 먹을 것 없는 어려움을 생각하니, 두렵고 근심되어 마치 몸 안에 통증이 있는 것만 같다. 굶주리는 자의 선별에 누락이나 함부로 함이 있거나, 나누어 주는 일을 정밀하게 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내 마땅히 상벌을 내리겠다.대신이 접때 수령의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자는 진작에 파면하여 내쫓아야 한다고 아뢰었는데, 각 도가 아직껏 조용하기만 하니, 이것이 어찌 참된 마음으로 왕명을 받들어 선양하는 도리이겠는가.”

하고, 다시 3도에서 새해에 진상하는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의 봉진(封進)을 모두 중지하고 기민 구제에 보태어 쓰도록 명하였다.

○ 선혜청의 쌀을 싼값으로 서울의 빈민들에게 팔도록 명하였다.


[주D-001]효명세자(孝明世子) : 순조의 세자, 곧 익종(翼宗). 순조 30년에 승하하고 시호를 효명(孝明)이라 했으며, 동 32년에 입묘(入廟)할 때 묘호를 문호(文祜)라 했음. 그 뒤 헌종이 즉위하여 왕으로 추존하고 묘호를 익종(翼宗)이라 했는데, 광무(光武) 3년에 익황제(翼皇帝)로 추존하고 묘호를 문조(文祖)라 했음.




임란북천전적비(壬亂北川戰蹟碑) 영남(嶺南)의 큰 고을 상주(尙州) 자산성(子山城) 아래 증연(甑淵, 學士潭) 일대의 북천(北川).






"24일.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은 인동(仁同)으로 해서 낙동강을 건넌 다음 선산(善山)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고, 신령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의흥으로 옮겨 함락시키니 현감 노경복(盧景福)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김수가 박진(朴晉)과 배설(裵楔)에게 선산에 가서 왜적을 정탐하라 했는데, 도중에 죽패(竹牌)를 차고 있는 7명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박진 등이 왜적의 무리인가 의심하여, 말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꿇어앉아 왜의 글을 바치는 것이었다. 위쪽에는 크게 영(令) 자 한 자를 썼고, 그 아래에는 잔 글씨로, “군현의 백성들은 속히 옛집으로 돌아가 남자는 모를 심고 보리를 거두며, 여자는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 각각 자기 집 일에 힘쓰라. 만약 우리 군사가 법을 범하면 반드시 처벌한다. 천정(天正) 20년 월 일 습유시중(拾遺侍中) 평의지(平義智).” 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엔 이름까지 적혀 있다. 박진 등이 그들을 포박해 오다가, 졸지에 왜적을 만나자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 영남 사람으로 왜적에 항복하여 패(牌)를 받은 자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 이르렀는데 척후(斥候)에 밝지 못한지라, 왜적이 이미 선산을 지났다고 고하는 자가 있었는데도 이일은 그가 군중(群衆)을 현혹시킨다고 노하여 그를 목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니, 왜적이 이미 다가왔음을 듣고서도 감히 먼저 고하는 자가 없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어리석은 자라도 천 가지를 생각하면 반드시 한 가지는 아는 게 있기 마련인데, 가소롭다, 차라리 한 가지도 아는 게 없을 망정 척후로 정탐을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요략이요, 사술(詐術)과 궤모(詭謀)는 명장(名將)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건만, 정도(正道)만 지켜 패배를 기다린다는 일은 옛날에도 있었단 말을 못 들었다.

25일.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매, 이일(李鎰)이 대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날 새벽 안개가 자욱할 무렵 포성이 들려 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당도했음을 바로 알아채고 이일이 성 밖 북천(北川)에 나가 진을 치다.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다. 종사관 박지(朴篪), 이일의 종사관이다. 이경류(李慶流), 변 기(邊璣)의 종사관이다. 윤섬(尹暹)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살해되었고, 이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려 충주(忠州)로 돌아오다. 박지는 김수의 사위다. 그때 나이는 22세,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되었었다. 박지가 자기 군중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하여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박지는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함양(咸陽) 사람 인언룡(印彦龍)을 만나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받았건만 지금 전쟁이 불리해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용안(龍顔)을 뵙겠나.”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다.

26일. 흉악한 왜적이 상주(尙州)로부터 함창(咸昌)과 문경(聞慶)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은 변란 초기부터 관청의 문을 떠나지 않았다. 이날도 막 대문 앞에 앉아서 관의 창고를 부수어 흩뜨린 토적(土賊)을 처형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방비가 허술한 문으로 해서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고, 신길원은 홀로 말을 타고 산 기슭으로 피해 들어갔다. 왜적이 쫓아가서 그를 항복시키려고 하였으나 신길원이 호되게 꾸짖고 굽히지 않자 왜적이 그의 사지를 절단한 후에 죽였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도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의 한 줄기 충절을 만고에 누군들 맞설 수 있으랴. 문경(聞慶) 전후로 오직 수양성(睢陽城)에서 순절한 장순(張巡)이 있을 뿐이다."

-난중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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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壬辰, 1592)

4월



○ 만력(萬曆) 임진(壬辰, 1592) 4월 20일


왜적(倭賊)이 상륙(上陸)했다. 일기(日記) 가운데 십여 장이 모두 떨어져 나가 첫 부분은 살펴볼 수가 없다.


○ 4월 23일 임자(壬子)


김산(金山)의 적들이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황간현(黃澗縣)으로 치달렸다. …〈결(缺)〉… 적들은 나누어 상주(尙州)로 향하기 위해 성(城)에 들어가 머물고 있었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의 북천(北川)에서 적들과 전투를 벌였지만, 관군(官軍)이 불리했다. 적들이 조령(鳥嶺)을 넘어 상주로 향하였는데, 이후로 거쳐 가는 주현(州縣)마다 적의 무리로 가득하여 강좌(江左)의 소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했다. 연변(沿邊)의 군현(郡縣)들도 연락이 단절되어, 대부분 왜놈〔倭奴〕의 소굴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오직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이 다양한 방략(方略)으로 힘을 다해 방어했다. 적이 세 차례나 성 아래까지 도달했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을 보이지 않은 채, 갑옷과 병기를 수선하며 방어의 계책을 마련하는 늠름한 모습이 마치 파도가 밀려와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지주(砥柱)와 같았다. 만약 군대를 이끄는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준민(俊民)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면, 어찌 이토록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경우가 있었겠는가. 준민은 경성(京城) 사람이다. ○ 우수사(右水使) 원균(元均)은 사망한 절도사(節度使) 준량(俊良)의 아들로 평소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변란이 발발한 초기부터 전함에 올라 적을 방어하며 하루도 육지에 발을 내린 적이 없었다.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李舜臣) [우상(右相) 유성룡(柳成龍)이 천거하였다.] 과 한마음이 되기를 약속하고는 전력을 다해 적을 추격해 격파했다. 적들이 더 이상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된 것은 양 수사(兩水使)의 공로이다.


○ 4월 24일 계축(癸丑)


적들은 잇달아 호서(湖西)의 군현들을 함락시켰다. 순찰사(巡察使) 윤선각(尹先覺)도 역시 방어할 수 없었다.


○ 4월 25일 갑인(甲寅)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 충주(忠州) 달천(達川)에서 적과 맞닥뜨렸으나, 대응 조치가 적절하지 않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익사(溺死)했다. 정병(精兵) 5백여 명도 모두 물에 빠져 숨졌다. 이 소식을 왕에게 보고한 사실이 알려지자 경사(京師)로 관문(關文)을 보내 보고하니 이때문에 [신립의 패군 장계는 4월 28일에 궁궐에 도착] 떠들썩했다.


○ 4월 26일 을묘(乙卯)


적들이 충청도(忠淸道)와 강원도(江原道)의 각 읍(邑)을 함락함에 따라 도로가 막혀 버렸다. 경상도(慶尙道)의 백성들은 풀과 숲으로 달아나 엎드려 숨고 굴속의 흙바닥에 몸을 눕혀야 할 처지에 놓여, 어육(魚肉)이나 다를 바 없게 되니, 조금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 4월 27일 병진(丙辰)


적들이 진해(鎭海)ㆍ고성(固城) 등의 관아(官衙)로 들어갔다.


○ 4월 28일 정사(丁巳)


신시(申時)에 신립(申砬)의 패군(敗軍) 장계가 궐에 들어왔다.


○ 4월 29일 무오(戊午)


적들이 용인현(龍仁縣)에 들어왔다. ○ 감사(監司) 김수(金睟)가 적과 싸우기를 두려워하여 거창(居昌)에 숨어들었다. ○ 의령(宜寧)의 유학(幼學) 곽재우(郭再祐) …〈결(缺)〉….


○ 4월 30일 기미(己未)


사경(四更)에 왕이 도성(都城)을 떠나려고 하였다. 유홍(兪泓)이 간(諫)하기를, “사직(社稷)이 …〈결(缺)〉… 이곳의 전하(殿下)에게 달려 있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듣지 않아 결국 서행(西幸)의 논의가 있었다.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근왕(勤王)의 명분을 칭탁(稱託)해 군사를 경사(京師)에 합류시켰다.


[주D-001]김산(金山) : 지금의 경북 김천(金泉).

[주D-002]이일(李鎰) : 1538~1601.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경(重卿).

[주D-003]김준민(金俊民) : ?~1593. 조선 중기의 무신.

[주D-004]원균(元均) : 1540~159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평중(平仲).

[주D-005]이순신(李舜臣) : 1545~1598.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주D-006]유성룡(柳成龍) : 1542~1607.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

[주D-007]윤선각(尹先覺) : 1543~1611.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수천(粹天).

[주D-008]신립(申砬) : 1546~1592.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입지(立之). 시호는 충장(忠壯).

[주D-009]신시(申時) : 오후 3시~5시 사이.

[주D-010]김수(金睟) : 1547~1615. 본관은 안동. 자는 자앙(子昂). 호는 몽촌(夢村). 시호는 소의(昭懿).

[주D-011]곽재우(郭再祐) : 1552~1617.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

[주D-012]사경(四更) : 새벽 1시~3시 사이.

[주D-013]유홍(兪泓) : 1524~1594.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지숙(止叔). 호는 송당(松塘). 시호는 충목(忠穆).

[주D-014]이광(李洸) : 1541~1607.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사무(士武). 호는 우계산인(雨溪散人).


ⓒ 남명학연구원 ┃ 박병련 설석규 신병주 정우락 한명기 (공역) ┃ 2009



"(이일이 문경에 도착하니) (대구 뿐 아니라) 문경에서도 나와서 기다리는 자가 없었다. 공이 드디어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량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함창(咸昌)을 지나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는 산속으로 달아나고 홀로 판관 권길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공이 병사가 없음을 책망하고 뜰로

끌어내어 목을 베려하니 권길이 슬피 고하기를 나아가 군사를 모아오겠다고 자청하였다.

밤중이 되어서야 마을을 수색해 겨우 수백명을 모집하여 도착했는데 모두가 농민들이었다.

공이 상주에 머물던 첫날에 창고를 열어 쌀을 내어주며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들이니 백성들이 산골짜기로부터 한 사람씩 나오기 시작하는데

또한 수 백여 인에 불과하였다. 갑작스럽게 대오를 편성하니 싸움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이때 적군이 이미 선산善山에 이르러 밤에 장천고현長川古縣에 주둔하니 상주에서 20리 떨어졌는데, 척후병이 이르지 않아 적이 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에 공이 오합지졸인 민병과 서울에서 내려온 장사 겨우 8,9백명을 인솔하고, 고을 북쪽의 냇가에 진을 치는 훈련을 하였다.

마침내 산을 의지하여 진을 치고, 진중에 대장기를 세우고 기 아래에 말을 세웠는데, 미처 반을 치기도전에 바라보니 적 수명이 산림 속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멀리서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또 성 안 여러 곳에서 연기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공이 군관 한 사람을 시켜 가서 정탐하게

하였더니, 왜병이 먼저 와서 미리 다리 아래 매복했다가 총을 쏘고는 머리를 베어 돌아갔다. 잠시 후에 적병이 대거 이르러 조총을 어지러이 발사하니 장사들이 곧 죽었다. 여러 장수가 옮겨가기를 청하니 병사를 조금 뒤로 물렸다.

공이 칼을 잡고 큰 소리로, "어제 명을 받아 싸움을 독려하는데 어찌 감히 물러나 살기를 바라리오"하며 군사를 독려하며 화살을 쏘게 하였는데,

모두 수십 보를 날아가 떨어져서 적을 살상치 못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좌.우익으로 나누어 나와 아군의 뒤쪽으로부터 포위해 들어오니 

미처 적의 선봉과 교전하기도 전에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으로 문경에 이르러 패한 장계를 치계하니 임금께서 회유하시기를, "경의 장계를 보니 아군이 또한 불리했음을 알겠노라.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경이 마음을 다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잠시 경의 죄를 용서하니 뒤에 공효를 거두어 빚을

갚도록 하라. 경은 모름지기 흩어진 백성들을 부곡에서 불러 모아 신립과 서로 힘을 모아 상유의 공효를 도모토록 하라. 

만약 적병이 바야흐로 계속 나아와 사세가 여의치 않다면 혹은 서울로 와서 호위하거나 혹은 행재를 따라 호위할 것이며, 경은 마음을 다해

시행토록 하라. 또 각 도의 감사와 병사兵使, 나라를 지키는 신하들에게 통유하노니, 각자는 한 마음으로 힘써 창의倡義하여 용감히 사직의

위급함을 구하라" 하였다. 공은 이에 유지有旨(승정원의 담당 승지를 통하여 전달되는 왕명서)를 받들어 조령으로 물러나 지키려다가

원수 신립이 충주에 도착해 있다는 말을 들었고, 또한 부름을 받았으므로 변기 등과 함께 충주에 이르렀다. 

28일에 신립이 탄금대 두 물 사이에 나아와 진을 치고 공에게 선봉을 맡겨 단월역에 주둔케 하였다.

잠시 후에 왜적이 길을 나누어 도착하였는데, 군세軍勢가 풍우風雨와 같았다. 한 쪽은 산을 돌아서 동쪽으로 나아오고 한 쪽은 강을 따라 내려왔다. 포성이 땅을 흔들었고 흙먼지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공이 마침내 돌진하여 싸워서 10여급을 베었는데, 적병이 좌.우익으로 나누어 

이미 신립.이빈의 양군을 격파한 상태였다. 모든 군사들이 다 물속으로 들어가 죽으니 시체가 강을 덮어 떠내려갔다. 

공은 한필의 말과 한 개의 창에 의지하여 포위를 둟고 나아와 구불구불 험한 길을 헤쳐서 이천利川에 이르러 창호지를 잘라 붙여 '구계具啓'하고,

군관 이치중에게 영을 내려 수급을 올렸는데, 29일 밤 경루가 끝날 무렵에 장계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어가가 의주로 갔다. 

처음에 조정에서 적병賊兵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 공이 혼자 힘으로 지탱하기 어려움을 염려하였다.

신립은 한 때의 이름난 장수로 군사들이 외복하였으므로 도순변사가 되었는데, 중병重兵(대군大軍)을 인솔하여 (이일의) 그 뒤를 잇게하였다. 

두 장수가 힘을 합치고자 한다면 거의 적을 막을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본도(경상도)의 수군과 (경상도의) 육군의 장수들은 모두가 소문을 듣고

놀라서 멀리 달아나기만 하고 한번도 교전하지 않으니 적이 이르러 육지로 올라와 북을 울리고 밤낮으로 거리낌 없이 행동하였다. 

북으로 올라오는데 한 사람도 만나 대적하는 자가 없으니 조금 진군 속도를 늦췄는데 불과 10일이 못되어 상주에 도착하였다.

공은 객장客將(자기 구역이 아닌 다른 관할 구역에 와 싸우는 장수)으로 (경상도) 군사가 없으니 갑자기 서로 대치하는 형세가 되어

대적할수가 없었으므로 원수가 진군하고 후퇴함에 의지할 곳을 잃어 일이 실패하고 말았다." -자헌대부 충청전라경상 삼도순변사 무용대장 행한성판윤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지훈련원사 증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지의금부사 이공 행장 전의 후인 이담 18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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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이 장기(壯騎)와 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이일이 비로소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이미 고을이 한 사람도 없이 텅 빈 상태였다. 이에 스스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들을 먹이고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산곡(山谷)에 들어가 숨었다. 이일이 판관 권길(權吉)을 잡아들여 군대를 뽑도록 당부하였으나 한 사람도 얻지 못하였으므로 참(斬)하려 하였다. 이에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선조수정실록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상주민병대)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기재사초 하 임진잡사




 


"정경세가 아뢰기를,


“근일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이일(李鎰)을 많이 헐뜯고 있습니다만 상주(尙州)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변 초기에 영남 사람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왕사(王師:서울 군대)를 크게 기다렸고, 열군(列郡)의 군졸들은 통속(統屬)할 곳이 없었는데 이일이 상주에 이르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군사를 먹이고 성의 있는 말로 일깨움으로써 하루 사이에 장사 3천 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평야로 나아가 진을 치고 진치는 법을 배워 익힐 무렵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앞 시내에 도착하여 넓은 들판에 가득 차 있었는데도 이일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힘을 다해 싸우던 중 윤섬(尹暹)과 박호(朴箎)가 모두 전사하자 이일이 단기(單騎)로 탈출하여 충주(忠州)에 물러나 있다가 신립(申砬)과 같은 날 패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산(釜山)에서 한번 패배한 뒤로 왜적과 대항하여 싸운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유독 이일만이 군졸을 규합하여 왜적과 접전했으니, 끝내 비록 패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사람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증(李增)이 아뢰기를,


“왜적은 접전할 때에 모두 조총(鳥銃)으로 선봉을 삼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우리 나라는 오합지졸로 선봉을 삼고 용맹한 군사들은 뒤에 있게 하였으므로 선봉대가 무너지자 온 군대가 덩달아 도망쳤습니다. 강찬(姜燦)이 단천 군수(端川郡守)가 되었을 때 왜적과 접전하면서 잠시 전진하고 잠시 후퇴하면서 거짓으로 패하여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적의 탄환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려 군사를 내보내어 짓밟았으니, 강궁(强弓)의 아래에서 전멸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보잘것없는 적이니, 만약 세 부대로 나누어 차차 포(砲)를 쏘면서 교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더라면 어떻게 감히 당해냈겠는가.”


하였다."-선조 65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7월 24일(을미) 1번째기사


대신들과 인견하다






"25일. 아침에 이일이 오히려 적이 없다고 하여 개령 사람을 끌어내어 베어서 여러 사람 앞에 돌리고 인하여 편성(編成)한 민병과 경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을 북쪽 시냇가에서 진법을 연습하느라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대장의 기와 북을 세우고 이일은 그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과 수찬(修撰) 박지(朴箎)와 상주 판관 권길과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등은 다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 있었다."-재조번방지









이일이 정예기병군관 60명 데리고 상주로 출발함. 각 군관들은 일단 자기들에게 소속된 6천 중 4천 군사를 데리고 상주로 감.


이일이 상주에 도착하자 민병대 1천을 모음. 그리고 상주에 뒤이어 서울의 2천 장사가 도착해 60군관 6천 군사가 다 채워지고 상주 민병대 1천이 거기에 부록으로 추가된 형태가 됨.




6천 군사는 산에 진치고 거기에 대장기 세워둔후 산 앞쪽 시냇가에서 민병대 1천에게 진법을


가르치던 도중에 왜군이 우르르 몰려온거임.
















 상촌선생집 제56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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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志)

여러 장사들이 왜란 초에 무너져 패한 기록[諸將士難初陷敗志]


적병이 처음 부산에 이르렀을 때 망을 보던 관리가 대략 4백여 척쯤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적이 부산을 함락하고 잇따라 그 지역 일대의 진보(鎭堡)를 함락하자 여러 고을에서 멀리 바라만 보고 저절로 무너져 그 뒤로는 망을 보며 정탐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적의 대군이 후속 부대를 계속 보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바다를 덮으며 왔는데도 변장(邊將)이 이를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처음 보고해 온 것에 의거하여 늘 적의 병력은 단지 4백 척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우순찰사(右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은 말하기를 “적의 배가 4백 척이 채 되지 않는데 한 척에 수십 명밖에 싣지 못하는 실정이고 보면 다 합해도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성일의 이러한 주장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도 그렇게만 여겼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출정할 때 단지 군관(軍官) 및 사수(射手) 60여 인을 이끌고 가면서 내려가는 도중에 군사 4천여 명을 거두워 모았다. 4월 24일 상주(尙州)에 도착했는데, 이일의 생각에 우리 군사가 오합지졸인 만큼 마땅히 습진(習陣)시켜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을 미처 반도 펼치기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렀으므로 별수없이 대진(對陣)하였으나, 교전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를 쏘아대 철환(鐵丸)이 비오듯 쏟아졌으므로 아군이 대적하지 못하였는데, 이에 적이 함성을 지르며 진을 무너뜨리자 우리 군사가 궤멸되면서 사상자가 무더기로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서 이일만 단기(單騎)로 몸을 빼어 달아나고 종사관(從事官) 윤섬(尹暹)ㆍ박지(朴篪) 등은 모두 죽었다.

조정이 이일을 보낸 뒤 얼마 되지 않아 날로 급하게 변보(邊報)가 들어오기를 “적이 이미 내지(內地)로 쳐들어오고 있는데 장차 조령(鳥嶺)을 넘으려 한다.” 하자, 도성 인심이 어수선해지면서 피난갈 준비들을 하느라 부산하였다. 이에 또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은 뒤, 더욱 도성 내의 무사와 재관(材官)을 동원하고 삼의사(三醫司 내의원(內醫院)ㆍ전의감(典醫監)ㆍ혜민서(惠民署)) 한량인(閑良人) 중에서 활을 쏠 줄 아는 자까지 뽑아 모두 그에게 소속시키는 한편, 조관(朝官)으로 하여금 각각 전마(戰馬) 1필씩을 내어 조력하게 하고, 무고(武庫)의 군기(軍器)를 꺼내 주어 그가 쓰게끔 하였다. 이때 징집된 제도(諸道)의 군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신립이 급히 내려가면서 단지 인근 고을의 군사만 이끌고 갔다.

4월 26일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병력이 겨우 수천 명밖에 안 되었는데 이 군사로 단월역(丹月驛)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때 이일을 만났는데 이일로 선봉을 삼아 그로 하여금 공적을 세워 보답하게 하였다. 혹 말하기를 “적의 세력이 지극히 성대하니 그 예봉에 직접 맞서기는 어렵다. 조령에 나아가 협곡 안에 군사를 매복하고 적이 골짜기 입구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리가 양 쪽 언덕에 의거하여 높은 곳에서 활을 쏘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였으나,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그러나 적은 이미 조령의 길을 거쳐 몰래 군사를 잠입시켜 충주 성중에 이르렀는데도 신립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28일에 적이 민가를 불태운 뒤에야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왔다는 것을 우리 군사가 알고는 간담이 떨어지도록 모두 경악하며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바라보니 왜적들이 조령의 큰 길을 통해 산을 뒤덮으며 내려오는데 칼빛이 번쩍번쩍하였다. 신립이 군사들을 지휘하여 차례로 진격시켰으나 마을 길이 비좁은데다 논밭이 많아 말을 치달리기에 불편하여 머뭇거릴 즈음에 적이 우리 군사의 좌측으로 돌아 나와 동쪽과 서쪽에서 끼고 공격해 오는 바람에 우리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적에게 난도질을 당한 결과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군자(軍資)와 군기(軍器)가 일시에 모두 결딴나고 말았다. 신립이 단신으로 말을 타고 강 언덕에 이르렀는데 적이 군대를 풀어 추격하자 신립이 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김여물(金汝岉)도 물 속으로 투신하였다.

신립의 군대가 패하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였는데, 우상 이양원(李陽元)을 남겨두어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경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한강에 나아가 진을 치게 하였다. 5월 2일 적의 선발 부대가 이르자 대군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대가가 성을 빠져 나간 뒤 도성 백성들이 서로들 도적떼로 변해 궁실을 불태우고 재물을 노략질하는 등 도성 안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양원이 지키지 못할 줄을 알고 양주(楊州)로 달아났는데 성문도 폐쇄하지 않은 상태였다. 적이 처음 이르렀을 때 성문이 열려져 있고 사마(士馬)의 흔적이 전연 없이 조용한 것을 보고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하다가 3일이 되어서야 성이 실제로 텅 빈 것을 알고는 마침내 도성에 들어왔다.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 신할(申硈)이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대가가 머문 곳을 뒤따라 오다가 송경(松京)에서 배알하자, 상이 이를 인하여 신할을 방어사로 삼아 임진(臨津)에 머물러 진을 치게 하였다. 또 한응인(韓應寅)을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로 삼아 김명원을 대신해서 임진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고, 평안도 강변의 토병(土兵) 8백 명을 동원하여 성세(聲勢)를 돕게 하였다. 당시 이양원(李陽元)ㆍ이일(李鎰)ㆍ신각(申恪)ㆍ김우고(金友皐) 등은 대탄(大灘)에 있고, 한응인ㆍ권징(權徵)ㆍ신할ㆍ이천(李薦)ㆍ이빈(李薲)ㆍ유극량(劉克良)ㆍ변기(邊磯) 등은 임진에 있었는데, 5월 18일에 회전(會戰)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때 의논하는 이가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많다고는 하나 거의 대부분이 약졸(弱卒)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강변의 토병뿐인데 토병이 멀리서 오느라고 지쳐 있으니, 며칠쯤 늦추어 그들이 휴식을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사한다면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17일 야음을 틈타 군사를 도하(渡河)시켰는데, 좌위장(左衛將) 이천이 상류 강 언덕에서 적군을 만나 급히 치다 패배를 당하였으며, 유극량도 죽고 신할도 패몰(敗沒)한 가운데 적이 마침내 임진을 건너오게 되었다.

조정이 제도(諸道)의 군사를 동원하여 들어와 응원토록 하니,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이광(李洸)이 그 도의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 및 조방장(助防將) 이지시(李之詩)ㆍ백광언(白光彦) 등과 함께 전라도 군사를 이끌고 오고, 충청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이 그 도의 방어사 이옥(李沃) 및 절도사(節度使) 신익(申翌) 등과 함께 충청도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무리가 수만이었으며, 경상 순찰사 김수(金睟)는 사졸을 잃고 단지 군관 30여 인만 이끌고 왔다. 이에 약속한 대로 6월 4일에 각자 길을 나누어 진격해 양천(陽川) 후포(後浦)에서 집결하였는데, 백광언이 선봉장으로 용인(龍仁)에서 적을 만나 창졸간에 교전하다가 패하여 전사하면서 대군이 한꺼번에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빠지듯 저절로 궤멸되어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었으며, 그 결과 군기(軍器)와 치중(輜重)을 몽땅 적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런데 뒤에 듣건대 처음에 왔던 적은 3명뿐이었고 그 뒤에 온 적도 겨우 1백 명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양도(兩道)의 수만 군사가 백 명의 적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마치 폭풍에 나뭇잎 떨어지듯 하였으니, 이는 옛날에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3도 군사가 모이게 된 것부터가 그러하였다. 김수는 이미 패망한 뒤끝이라서 겨우 자기 몸만 왔고, 윤국형은 원래 장재(將才)가 못 되었다. 그리고 이광은 변란 소식을 듣고서도 난을 구하러 달려갈 뜻이 없었는데, 본도에 있을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祐)가 이광을 찾아가서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는 의리를 극력 말했어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군대를 동원하는 명이 내려오고 나서야 비로소 급히 서둘러 군사를 모은 뒤 공주(公州)까지 갔다가 경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군대를 해산시켰는데, 이때에 이르러 재차 기병(起兵)했다가 재차 무너졌으므로 조야(朝野)가 모두 이광을 죄인으로 여겼다.

하여튼 이로부터는 나라에 방어하는 자가 없게 되어 적이 위세를 한껏 떨치면서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팔로(八路)를 석권하였다. 그리고 각 두목들을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고 수가(秀家) 자신은 경성에 주둔하였는데, 부산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각 사(舍)마다 보루를 쌓아 방벽을 삼았다. 이때 거느린 적의 무리가 대략 25~26만쯤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정탐을 잘하지 못해 실제로 몇만이 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한편 청정(淸正)은 함경도에 들어가 왕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및 수행한 재신(宰臣)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ㆍ황혁(黃赫) 등을 사로잡아 구류시켰고, 기보(畿輔)의 적은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파헤치는 등 국세가 미약한 탓으로 신인(神人)에게 비통함을 안겨 주었는데, 다행히도 평양으로 진출한 적의 경우만은 순안(順安) 일보 직전에서 멈추고 진격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서 이광(李洸)의 직책이 깎이고 권율(權慄)이 그를 대신한 뒤로 정기(旌旗)가 성벽 위에 힘차게 나부끼고 옛 모습이 일신되었는데, 권율이 군사를 이끌고 북상(北上)하다가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초토사(招討使) 이정암(李廷馣)은 연안성(延安城)을 지키면서 성을 포위한 적을 격퇴하였다. 전라 수사(全羅水使) 이순신(李舜臣)ㆍ이억기(李億棋) 등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군으로 적을 꺾으며 전승을 거두었다. 의병 역시 각처에서 다투어 일어나 관군에 호응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상도의 김면(金㴐)ㆍ곽재우(郭再佑)와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과 충청도의 조헌(趙憲)ㆍ영규(靈圭)가 더욱 유명하였으며, 기타 각 고을에서 일어난 소규모의 의병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데, 나라의 명맥이 이들 덕분에 보존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중국 조정에서 원군을 내보냄으로써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는 공적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었다.





선조 4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윤11월 14일(갑오) 2번째기사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 유성룡을 인견하고 중국 사신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나아가 막차(幕次)에서 영의정 유성룡을 인견하였는데, 도승지 심희수(沈喜壽), 주서 남이신(南以信), 대교 김상준(金尙寯), 검열 박동선(朴東善)이 입시하였다. 유성룡이 나아가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좌우를 물리치고 써서 보이기를 ‘내가 성실하고 정직하게 물을 것이니 묻는 일에 숨기지 말아야 한다.’ 하기에, 답하기를, ‘노야(老爺)가 묻는데 소생이 감히 성실하게 고하지 않을 수 없거니와, 만약 성실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사신이 ‘천병(天兵)이 왜를 얼마나 죽였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소생이 안주(安州)에 있을 때에 들으니 천병이 적 1만여를 베었다 한다.’ 하였습니다. 사신이 ‘벽제(碧蹄) 싸움의 승패는 어떠하였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소생은 파주(坡州)의 진중(陣中)에 있었으므로 잘 알지는 못하나, 사 총병(査摠兵)이 불리하여 물러났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사 총병의 이름은 대수(大受)이다. 】 사신이 ‘이 제독(李提督)이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는데, 정말인가?’ 하기에, 신이 그렇다고 답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조신(朝臣)과 천장(天將)의 시비도 물었으나 신이 답하지 않았습니다. 또 ‘천조(天朝)의 병마(兵馬)가 백성들을 괴롭히고 해쳤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군대가 있는 곳에는 토지가 황폐한다 하는데 어찌 그런 일이 없겠는가. 그러나 유정(劉綎)·척금(戚金)이 여기에 있으므로 이제는 그런 폐단이 없다.’ 하였습니다. 대개 그는 조정의 사정을 잘 알고자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사정을 이제 힘껏 말하려 하는데, 나와 상대하여서도 써서 보이게 할 것인가? 창졸간에 답하기 어려운 일을 써서 보이게 한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나중에 찬찬히 써서 보이는 것이 무방할 것입니다. 말이란 경솔하고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니, 헤아려서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신이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에 듣건대, 왜가 절강(浙江)에서 3년 동안 떠나지 않고 마치 땅을 갈라 차지할 듯이 하였는데, 천하의 군사를 쓰고서도 수십 명의 왜적도 죽이지 못하다가, 그 뒤에 척계광(戚繼光)이 신유년2214) 이후에야 비로소 이겼다고 합니다. 중국은 이 적을 어렵게 여기니, 심유경(沈惟敬)이 나온 것은 오로지 이 적들을 꾀어 내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하책(下策)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적은 본디 정삭(正朔)을 받드는 나라가 아닌데, 조공(朝貢)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 적은 반드시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서 사방으로 나가 약탈할 것인데, 우선 화해를 청하여 우리 군사를 지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평안 감사(平安監司)만이 말하였다.”

하였다. 【이 때 이원익(李元翼)이 평안 감사였다. 】 상이 막차에서 나와 사신과 함께 전상(殿上)에 이르러 북향하여 서로 읍(揖)하고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이 남으로 내려가려 하신다 하는데, 추위를 무릅쓰고 내려가는 것이 미안할 뿐더러 경상 일로의 탕패(蕩敗)한 참상이 서로(西路)보다 심하니, 잠시만 머무르십시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은 단지 선유(宣諭)만을 위함이 아니라, 광해군(光海君)과 세 조(曹)의 판서(判書)가 내려 가는 일들을 의논하여 처리하고자 해서입니다. 유 총병(劉總兵)과 면대하여 의논하려 했는데 유는 영문(營門)을 떠나기 어려워하고 내가 대구(大丘)까지 가서 볼 수도 없습니다. 척 총병(戚總兵)도 갈 것 없다고 하는데 내가 가지 않더라도 적정(賊情)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어제 국도(國都)를 보니 매우 좋습니다. 다만 서쪽에 치우쳐 있으니 동남으로 조금만 옮기면 좋습니다. 내가 자못 풍수(風水)를 아니, 사람을 보내시면 가르쳐 주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앞으로 지도해 주십시오. 따로 써서 보여 주시면 더욱 기쁘겠습니다.”

하였다. 사신에게 바칠 적세(賊勢)에 관한 게첩(揭帖)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 배신(陪臣) 원임 의정부 영의정 정철(鄭澈), 영중추부사 심수경(沈守慶), 의정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등은 진정서(陳情書)를 삼가 바칩니다.

생각하건대, 소방(小邦)이 불행하여 이러한 화변(禍變)을 만나자 성천자(聖天子)께서 혁연(赫然)히 진노(震怒)하시어 흉추(兇醜)를 토벌해 베시고 위곤(危困)을 구제하시어 소방의 백성이 도탄에서 벗어나고 종묘(宗廟)·사직(社稷)이 다시 보전되도록 꾀하시었으니, 이러한 일은 전에 듣지 못하던 바이며 공(功)은 옛 역사에 없던 융성한 것이어서 두터운 덕의(德意)가 하늘에 닿고 땅에 차니, 소방의 군신(君臣)이 분골쇄신(粉骨碎身)하여도 갚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또 노야 태좌(老爺台座)가 천자의 명을 받들어 창잔(創殘)2215) 을 위무(慰撫)하고 소루함을 계칙(戒飭)하여 소방을 위하여 선후책(善後策)을 꾀하시면서 부드러운 안색과 웃음이 모두가 시종 안전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오니, 소방 사람들이 후덕한 모습을 바라보고 지극한 가르침을 들으매 산뜻이 다시 살아난 듯합니다. 구구하고 답답한 뜻을 때에 맞추어 분주하게 자문에 답하여 밝으신 천자께 아뢰어지기를 바라니, 노야(老爺)는 가엾이 여겨 살피시기 바랍니다.

삼가 살피건대, 소방에서는 지난 신묘년2216) 여름에 일본의 적추(賊酋)가 요승(妖僧) 현소(玄蘇)를 보내어 와서 변문(邊門)을 두들기고 투서(投書)하였는데, 그 말이 아주 도리에 어그러졌으며 소방을 협박하여 저들을 따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소방의 군신은 이를 절통하게 미워하고 근심하면서 반드시 적변(賊變)이 있을 것을 알고 곧 사신을 보내어 경사(京師)로 달려가 아뢰게 하였습니다. 또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를 경상도로, 이광(李洸)을 전라도로, 윤선각(尹先覺)을 충청도로,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일(李鎰)을 경기·황해도로 보내어 군정(軍丁)을 점열(點閱)하고 군기(軍器)를 수조(修造)하며 성지(城地)를 선축(繕築)하게 하였습니다.

또 경상도는 전에도 적침을 받은 땅이므로 부산·동래·밀양·김해·다대포(多大浦)·창원·함안 등지의 성을 증축하고 참호도 깊이 팠습니다. 내지(內地)의 성이 없는 곳으로서, 이를테면 대구부(大丘府)·청도군(淸道郡)·성주목(星州牧)·삼가현(三嘉縣)·영천군(永川郡)·경산현(慶山縣)·하양현(河陽縣)·안동부(安東府)·상주목(尙州牧)같은 곳은 다 백성을 징발하여 성을 쌓았습니다. 또 인정이 안일에 젖어 태만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국왕이 근신(近臣) 승지(承旨) 등의 관원을 잇달아 보내어 살펴보고 독촉하게 하고, 어기거나 게을러서 시기를 놓친 자에게는 경중에 따라 처벌하였습니다.

임진년 3월에 부산 첨사(富山僉使) 정발(鄭撥)이 비보(飛報)했는데, 대마 도추(對馬島酋) 평의지(平義智)의 배가 포구에 와 정박하여 첨사에게 투서한 속에 길을 빌린다는 따위의 말이 있었다 합니다. 소방에서는 이를 듣고 더욱 놀라고 분하여 그 글을 물리쳐 돌려 보내고 변방에 신칙하여 이들을 변경에서 다 쫓아내게 하고 머물러 기다리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더니, 평의지는 부산포의 섬 절영도(絶影島)로 돌아가 배를 대었다가 며칠 만에 앙심을 품고 떠났다가 그후 4월 13일에 적이 이미 변경을 침범하였습니다.

부산이 함락되자 첨사 정발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이튿날에 동래도 함락 되었는데,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 교수(敎授) 노개방(盧蓋邦),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珪) 이하 죽은 장관(將官)·군민(軍民)이 수만여 인입니다.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이 군사를 거느리고 양산·밀양 사이에서 잇따라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 밀양도 함락되었습니다. 그때 적봉(賊鋒)이 매우 날카로와 길을 곱잡아 나아가니, 인심은 놀라서 동요되고 열진(列鎭)은 미처 서로 구원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순변사 이일이 상주성 밖에서 맞아 싸우려 하였으나, 미처 포진하기도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러 조총(鳥銃)으로 사면에서 공격하니, 군사는 무너지고 이일은 겨우 몸만 피하였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 수찬(修撰) 박호(朴箎), 상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죽었습니다. 상주 백성들이 곳곳에서 서로 모여 힘껏 싸우고 한 사람도 투항한 자가 없어 죽은 자가 더욱 많고, 온 경내가 황폐화되었습니다.

이일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巡邊使)로서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지켰습니다. 적이 정탐하여 방비가 없음을 알고 밤새 재를 넘어 곧바로 나아가 성을 에워쌌습니다.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게 되자, 우리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금탄(金灘)에 빠지니,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충주는 경도(京都)의 상류에 있으니 충주를 이미 잃었으면 경성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경도 사람들은 이일·신립이 다 중병(重兵)으로 험애(險隘)를 막고 있었으므로 날마다 승전의 소식을 기다렸는데 패하였다는 보고가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또 성안의 정장(精壯)도 먼저 신립·이일과 여러 장관(將官)들이 뽑아 데려 갔고, 제도(諸道)의 원병도 미처 불러 모으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임금은 사세가 이미 급박해진 것을 알고 왕자(王子)와 재신(宰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사방에서 불러 모으게 하고, 자신은 서방으로 옮아가 상국(上國) 지방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정성을 바쳐 천자의 뜰에서 은혜를 빌어 회복을 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나라를 지키는 떳떳한 도리는 아닐지라도 또한 일을 헤아리는 권의(權宜)인데, 과연 천자의 생성(生成)하는 은혜를 입어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적변이 생긴 이래의 대체적인 사정입니다.

지난해 6월에 우리 임금이 의주(義州)에 계시면서 날마다 군량이 모자라 군용(軍用)을 이어 가지 못할 것을 근심하여, 판중추부사 유성룡(柳成龍)을 차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 신경진(辛慶晉), 제용감 정(濟用監正) 홍종록(洪宗綠) 등을 데리고 일로의 군량을 점열하게 하였습니다. 또 잇따라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 예조 참판 성수익(成壽益), 동지중추부사 이노(李輅), 전성군(全城君) 이준(李準)을 보내어 각각 관령(管領)하는 역참(驛站)에서 마초(馬草)와 양식을 독촉하게 하였습니다.

올해 정월 8일, 대군(大軍)이 평양(平壤)을 회복하던 때에는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을 전차(專差)하여 좌랑(佐郞) 김계현(金繼賢)·이자해(李自海)를 데리고 군사를 따라 같이 다니며 양식과 마초를 맡게 하고, 또 박충간을 재촉하여 여전히 전운(轉運)을 맡아 살피게 하였습니다. 또 분호조 판서(分戶曹判書) 권징(權徵)을 차출하여 종사관(從事官) 황치경(黃致敬)·권회(權恢)와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 신암(申黯)을 데리고 강화(江華)·교동(喬桐)에 들어가 공사(公私)의 저축을 다 징발하여 군량(軍糧)에 보태게 하고, 이어서 충청도·전라도의 바닷길로 조운(漕運)하는 것을 감독하여 계속하여 개성(開城)으로 수송하게 하였습니다. 또 사간원 정언 황극중(黃克中)을 보내어 근만(勤慢)을 살피게 하고 대신(大臣) 의정부 우의정 유홍(兪泓)을 시켜 모든 사무를 총독(總督)하여 밤낮으로 재촉해서 시각을 늦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4월 12일에 적이 도성을 떠나고 그날로 대군이 입성하였다가 5월에 대군이 적을 쫓아 남으로 내려갈 때에는 호조 판서 이성중이 대군을 따라가 양식을 맡았는데, 뜻밖에도 7일에 이성중이 함창(咸昌)에서 병으로 죽었으므로 조도관(調度官) 홍문 정자(弘文正字) 윤경립(尹敬立)이 잠시 그 임무를 맡고 국왕에게 치계(馳啓)하였기에 곧 본조(本曹) 참의(參議) 정광적(鄭光績)을 보내어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또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와 조도사(調度使) 강첨(姜籤)을 충청도로, 검찰사(檢察使) 김찬(金瓚), 조도사 변이중(邊以中)·임발영(任發英) 등을 전라도로 나누어 보내어 군량을 찾아 모으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홍문관 교리 박홍로(朴弘老)를 보내어 두 도(道)를 재촉 독려하여 전수(轉輸)하게 하였습니다.

이 뒤의 절차는 경략(經略)의 비계(秘計)를 받들어 선후책(善後策)을 헤아려 공조 참판 이노(李輅)와 공조 좌랑(佐郞) 최흡(崔洽)을 빨리 보내어 설험(設險)하는 등의 일을 맡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군병을 조련하는 일은 이미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권율(權慄)에게 맡겨 유 총병(劉總兵)의 관하에서 세 도(道)의 민정(民丁)·군장(軍壯)을 다 징발하여 영문(營門)에 나아가 지휘를 받게 하였습니다. 또 의정부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제총(提總)케 하여 모두 감히 게을리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광해군(光海君)은 지난번 변이 일어난 이후로 산을 넘고 내를 건너면서 무로(霧露)를 무릅쓴 탓으로 혈기(血氣)를 상하여 오랫동안 낫지 않으므로 잠시 해주(海州)에 머물러 있으면서 의원을 찾아 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 성지(聖旨)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황공하고 감격하여 감히 앓는다고 말하지 못하고 이미 병을 무릅쓰고 도성에 왔으니 곧 남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소방이 미약하여 한번 미치광이 도둑에게 침범당하자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왕사(王師)를 들판에서 노고하게 한 지도 이미 한 해가 넘었습니다. 번병(藩屛)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여 성천자(聖天子)께 동쪽을 돌보는 근심을 크게 끼쳤으니, 죄를 피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방은 이 적이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로서 자손 만대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습니다. 적이 이미 우리 사직(社稷)을 짓밟았고, 우리 구롱(丘隴)을 파헤쳤으며, 우리 백성을 도륙하였고, 우리 자녀를 잡아갔고, 우리 재곡(財穀)을 탕진케 하였으니, 나라 안의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속을 썩히고 이를 갈며 적 앞에 나아가 죽으려 하는데, 더구나 천위(天威)에 힘입어 후환을 대비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어떤 큰일이고 어떤 기회인데, 또한 무슨 마음으로 우물쭈물 너그럽게 놓아 두어서 스스로 망하는 지경으로 나아가 재조(再造)의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그러나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적이 물러가지 않았으므로 힘쓸 겨를이 없고, 힘쓸 겨를이 없으므로 일이 미치지 못하는지라, 비록 국력을 쌓고 병정을 훈련하여 말년을 수습하려 해도 또한 스스로 떨치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소방이 밤낮으로 답답해 하는 바입니다.

이제 경상도에 적이 있는 곳으로는 울산(蔚山)의 서생포(西生浦)와 동래(東萊)·부산(釜山)과 양산(梁山)의 상용당(上龍堂)·하용당(下龍堂)과 김해(金海)·창원(昌原)이며, 바다 안은 가덕(加德)·천성(天城)과 거제(巨濟)와 거제의 영등포(永登浦)와 장문포(場門浦)입니다. 소방의 맹장(猛將)·정병(精兵)이 전후(前後)로 힘껏 싸우다가 함안(咸安)·진주(晉州) 사이에서 죽은 자가 무려 수만여 인이며, 적의 수미(首尾)가 가도·우도에 걸쳐 수백 리에 뻗쳐 있으면서 번갈아 나와서 마구 약탈해 왔는데 다행히도 천병(天兵)이 대구(大丘)·경주(慶州)에 압림(壓臨)하여 있으므로, 울산의 적이 경주로 넘어오지 못하고 동래의 적이 대구로 넘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북(西北)에 있는 본국의 제장(諸將) 즉 이빈(李薲)·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선거이(宣居怡) 등도 또한 범이 산에 있는 위엄을 빙자할 수 있어서 영잔(零殘)한 군졸을 거두어 의령(宜寧)·울산·경주 사이에서 나누어 막으면서 날마다 혈전(血戰)하고 있는데 형세는 이미 위축되었습니다.

또 거제의 적이 전라도의 지경을 침범하기 쉬우므로 세 도의 주사장(舟師將) 이순신(李舜臣)·원균(元均)·이억기(李億麒) 등을 시켜 수군 1만여를 거느리고 한산도(閑山島)에서 서로 차단하여 서방으로 침범하는 길을 방비토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방이 오늘날 적에게 대비하고 있는 형세의 대략이며, 그 밖에 징발한 군사는 모두 총병의 영문에 가서 훈련을 기다립니다. 양식이 나오는 곳으로 말하면, 다 전라도에 의뢰하여 장만하고 있는데, 온갖 계획을 세워 밤낮으로 독촉하여도 길이 험하고 먼데다가 사람의 힘이 쉽게 고갈되어 이따금 군량이 모자랍니다. 어찌 감히 일부러 게을리하겠습니까. 대저 이곳에서 협박당한 사람으로서 그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것은 더욱 오늘날의 급무(急務)이므로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소방의 백성은 대대로 성명(聖明)의 동방을 염려하시는 교화에 힘입어 천지 사이에서 약간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 왔습니다. 우리 임금이 번복(藩服)을 지키시면서 서정(庶政)을 애쓰시며 감히 자만하지 아니하여 사냥 등의 오락을 끊고 연락(宴樂)에 빠지는 실책이 없었습니다. 성심을 다한 것은 첫째는 대국(大國)을 섬기는 것이고 둘째는 백성을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재위하신 기간 동안에 백성이 날로 번성하고 전야(田野)가 날로 개척되어 길에 굶어 죽은 자가 없었는데, 불행히도 갑자기 흉봉(兇鋒)을 맞아 백년 동안 번성했던 사업들이 한꺼번에 패멸(敗滅)하였습니다. 아아, 어찌 차마 말로 하겠습니까.

어려움을 겪은 뒤로 일이 간혹 이완되고 소홀하여 기한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신하들이 받들지 못한 죄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노심초사 뼈에 사무치게 나라의 치욕을 씻으려는 생각이야 어찌 잠시인들 잊은 적이 있겠습니까. 낮에는 먹을 겨를이 없고 밤에는 베개를 베지 않고서 일념으로 애태우는 것은 천지·귀신이 다 아는 바입니다. 오직 이러하므로 민심은 옛 나라를 생각하는 데에 간절하고 의사(義士)는 나라의 쇠망에 분격하여, 적이 서울을 함락한 뒤부터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각자 불러모아서 회복을 꾀하는 자가 여기저기에서 벌떼처럼 일어난 것을 이루 기록할 수 없는데, 이따금 힘껏 싸우고 굽히지 않아서 몸을 나라에 바쳐 절의(節義)가 뚜렷하게 드러난 자도 많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첨지중추부사 고경명(高敬命),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 거제 현령 김준민(金浚民), 충청 절도사 황진(黃進), 경상우도 절도사 최경회(崔慶會), 원임 좌랑(原任佐郞) 조헌(趙憲), 원주 목사 김제갑(金悌甲), 회양 부사 김연광(金鍊光),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 판관 성수경(成守慶), 옥천 군수 권희잉(權希仍),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奎), 해미 현감(海美縣監) 정명세(鄭名洗), 경상우도 절도사 유업잉(柳業仍), 절도사 김시민(金時敏),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첨지중추부사 유극량(劉克良), 상운 찰방(祥雲察訪) 남정소(南廷甦), 보령 현감(保寧縣監) 이의정(李義精) 등이 외로운 성을 지키거나 적의 보루를 공격하다가 적의 칼날에 쓰러질지언정 차마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적이 소방을 침범한 지 이제 이미 1년이 되었는데, 지방을 지키는 신하나 대대로 녹을 먹는 집안의 선비로서 제 몸을 더럽히고 적을 맞아들여 항복한 자는 참으로 하나도 없으며, 비록 무지한 우민(愚民)·걸인(乞人)·천례(賤隷)라도 한때 그들에게 잡혀서 스스로 빠져 나오지는 못하였어도 조금만 틈이 있으면 곧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서울 백성들은 적이 성안에 들어오고부터는 누구나 다 칼을 갈며 날마다 밖에서 구원하러 오는 군사를 기다려 안에서 호응할 것을 꾀하므로, 적이 끝내 그들에게 소용이 되지 않을 줄을 알고서는 정월 24일에 속임수를 써서 죄다 죽이니, 성안에 가득히 피가 흘렀습니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황해도·평안도의 백성으로 말하면, 안으로는 조도(調度)에 이바지하고, 밖으로는 정역(征役)에 종사하며, 역자석해(易子析骸)2217) 의 어려움을 갖춰 당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나, 한번 영(令)이 내린 것을 듣고는 도로에서 허둥지둥 뛰며 남녀 노소가 지고 싣고 따라가면서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으니, 민심의 소재를 알 수 있습니다. 나라를 일으키는 근본이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걱정되는 것은 태평을 누린 지 이미 오래 되어 기율로 말하면 해이하고, 기계로 말하면 예리하지 못하고, 군졸로 말하면 훈련되지 않았고, 장수로 말하면 마땅한 재목이 아니어서, 소란한 변이 눈앞에 닥쳐 와도 손발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천위(天威)가 이미 진노함에 저 추악한 무리가 넋을 빼앗겨 연해(沿海)로 물러가 진퇴를 망설이고 있으므로, 그 흉모(兇謀)를 헤아릴 수 없기는 하나 대세는 이미 꺾였습니다. 소방이 조금 더 시일을 얻어 지탱하여 망하지 않고 군사를 얻고 양식을 모아서 뒷날의 공효(功効)를 꾀한다면 천만 큰 다행이겠으며, 천조(天朝)에서도 이 큰 은혜를 다하여 위령(威靈)을 멀리 펴서 미약해진 왜의 형세로 하여금 다시 성대해지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자방(咨訪)은 사신의 큰 임무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노야(老爺)는 이 사정을 조정에 낱낱이 알리시어 소방으로 하여금 죄를 면할 수 있게 하고 바다의 요사한 기운도 일거에 깨끗이 소탕하여 삼한(三韓) 수천리의 백성이 구원의 은택을 길이 입게 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어찌 다행하지 않겠으며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번거롭고 줄이지 않아서 존위(尊威)를 모독하였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위와 같이 사연을 갖추어 올리니, 잘 살펴 전보(轉報)하여 시행케 하여 바친 자에게 이르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를 사신에게 바치고 말하기를,

“소방의 몹시 답답한 정상을 대인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어디에 고하겠습니까.”

하니, 사신이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국왕의 말씀입니까? 어느 사람이 쓴 것입니까?”

하였다. 장운익(張雲翼)이 말하기를,

“국왕이 분부하신 것을 배신(陪臣)이 썼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나도 들은 것이 있으니, 첩(帖)을 만들어서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팔도의 어느 주(州), 어느 현(縣)에서 훈련하고 있는 군사가 얼마이며, 호구는 얼마이고 축적한 양식은 얼마인지를 유 의정(柳議政)과 상의하여 기록해서 보여 주면 내가 보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들에게 들었는데, 사람들이 다 유 의정은 어진 신하라 하니, 반드시 상의하여 보여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손수 작은 첩자(帖子)를 썼는데, 그 게첩(揭帖)에,

“소방이 불행하여 갑자기 왜적의 화를 입어 군신이 달아나고 종사(宗社)가 폐허가 되었는데, 성천자(聖天子)의 천지·부모와 같은 인애(仁愛)로 발병(發兵)하여 구원하심을 힘입어 오늘이 있을 수 있었으니, 황은(皇恩)이 그지없어 밤낮으로 감격해 울거니와, 동국 만대에 그 만분의 일도 우러러 갚을 길이 없습니다. 경략(經略)·제독(提督) 두 분 대인께서 무릇 소방을 위하여 규획(規畫)하는데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삼도(三都)의 회복과 팔로(八路)가 거의 안정된 것은 참으로 두 대인의 은혜인지라 혈기가 있는 자는 누구나 다 은혜를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평양에서 처음 격파하자 천위(天威)가 진동하여 적이 다 넋을 빼앗기고 경성으로 달아났는데, 감히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꾀하여 교묘하게 조공(朝貢)하기를 바란다는 말로 핑계하여 드디어 그 추류(醜類)들을 온전히 보전하고 물러가 변성(邊城)에 웅거하였습니다. 동래(東萊) 【부산포(釜山浦)는 동래와 잇닿은 육지에 있다.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는 울산과 잇닿은 육지에 있다. 】·김해(金海)·웅천(熊川)·거제(巨濟)·천성(天城) 등지에 가득히 나뉘어 주둔하여 사방으로 출몰하며 약탈하더니, 근일에는 경주(慶州)·안강현(安康縣)에서 관군 2백여 명을 죽이었으니, 하늘을 얕보고 천리를 어기는 것이 이토록 극심합니다.

소방은 2년의 병화 끝에 백성의 힘이 이미 고갈되었고, 양식이 떨어져 공사(公私)간에 다 비었으니, 어떻게 대적하겠습니까. 조석으로 반드시 망하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대저 왜노(倭奴)는 천지 사이에서 지극히 흉악하고 지극히 교사한 별종(別種)이어서 모든 오랑캐와 다르고 짐승보다 심하여 까닭없이 남의 나라에 들어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병위(兵威)를 믿고 조공하기를 요구하며 변방에 둔거(屯據)하여 양식을 나르고 성을 쌓아 소굴을 만드니, 이것을 보면 그 꾀를 알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위력으로 억제해야 마땅하며 화해를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시경(詩經)》에 ‘융적(戎狄)을 응징한다.’고 하였으니, 반역한 자를 정벌하고 포악한 자를 주벌(誅罰)하는 것은 제왕(帝王)의 성전(盛典)입니다. 소방의 군신이 날마다 섬멸하는 거사를 바라기를 큰 가뭄에 구름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합니다. 생각하건대, 대인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오셨으니, 이는 소방이 다시 살아날 기회인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인께서는 적정을 분명히 살펴 조정에 상세히 아뢰어 한 나라의 백성을 구제하소서. 몹시 답답하고 절박하여 울며 간절히 빌어 마지않으니, 대인은 가엾게 여기소서.”

하였다. 상이 자리에서 내려와 친히 사신에게 바치니, 사신이 자리에서 내려와 받았는데, 좌우를 물리치고 보았으므로 시신(侍臣)들도 다 보지 못하였다. 사신이 홍첩(紅貼)을 가져다가 좌우를 물리치고 써서 자리에서 내려와 친히 상에게 바쳤다. 이렇게 한 것이 두 번이었다. 사신이 말하기를,

“잔치가 끝났으니 별배(別拜)를 하겠습니다.”

하니,【손수 쓴 소첩(小帖)은 위에 보인다. 】 상이 말하기를,

“예(禮)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잔을 올리겠습니다.”

하였으나, 사신이 사양하였다. 상이 예단(禮單)을 바치니, 사신이 말하기를,

“예물을 받은 것이 이미 많으니, 이제 다시 받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굳이 청하니, 사신이 받고 말하기를,

“후한 선물에 매우 감사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황은(皇恩)이 아니면 어떻게 대인을 뵈었겠습니까. 소방의 신민은 오로지 대인만 바라봅니다.”

하였다. 상이 환궁한 뒤에 봉서(封書) 한 통을 정원(政院)에 내렸는데, 이는 곧 사신과 함께 좌우를 물리치고 문답한 서찰이었다.

【태백산사고본】 26책 45권 30장 A면

【영인본】 22책 148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외교-명(明)


[註 2214]신유년 : 1561 명종 16년. ☞


[註 2215]창잔(創殘) : 다친 끝에 살아 남은 자. ☞


[註 2216]신묘년 : 1591 선조 24년. ☞


[註 2217]역자석해(易子析骸) : 남의 자식과 제 자식을 바꾸어 먹고 해골을 빠개어 불때서 밥을 지음. 적의 침범으로 포위를 당하여 큰 고난을 당하는 것을 말함.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 8년(哀公八年). ☞


 .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7번째기사


이달 3일 왜적이 경성에 침입하자 이양원·김명원이 퇴주하다      


이달 3일에 왜적이 경성에 침입하자 이양원(李陽元)·김명원(金命元)이 퇴주(退走)하였다. 당초 적은 동래(東萊)에서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 길은 중도(中道)로 양산(梁山)·밀양(密陽)·청도(淸道)·대구(大丘)·인동(仁同)·선산(善山)을 경유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일(李鎰)의 군사를 패배시켰고, 한 길은 좌도(左道)로 장기(長鬐)·기장(機張)을 거쳐 좌병영(左兵營)인 울산(蔚山)을 함락시키고 경주(慶州)·영천(永川)·신령(新寧)·의흥(義興)·군위(軍威)·비안(比安)을 지나 용궁(龍宮)의 하풍진(河豊津)을 건너 문경(聞慶)으로 진출해서 중로의 군사와 합류,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침입하였다. 이들은 다시 충주에서 두 갈래의 길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여주(驪州)로 가서 강을 건너 양근(楊根)을 경유하여 용진(龍津)을 건너 경성의 동로(東路)로 진출하였고, 하나는 죽산(竹山)과 용인(龍仁) 쪽으로 나아가 한강(漢江)에 이르렀다. 또 한 길은 김해(金海)를 경유하여 우도(右道)로 진출, 성주(星州) 무계현(茂溪縣)을 따라 강을 건너 지례(知禮)·금산(金山)을 거쳐 추풍령(秋風嶺)을 넘어서 충청도 영동현(永同縣)으로 진출, 청주(淸州)로 침입하였다가 방향을 바꾸어 경기로 향했다.


왜적의 정기(旋旗)와 검극(劒戟)은 천리에 끊이지 않고 포성(砲聲)이 여기 저기서 들렸다. 그들은 10리를 가거나 50∼60리를 갈 때마다 험한 곳을 점령하여 진영을 설치하고 밤이면 횃불로 서로 응하였다. 적이 한강 남쪽에 이르자 도원수 김명원이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제천정(濟川亭)에 주둔하였는데 적이 쏜 포환(砲丸)이 정자 위에 어지러이 떨어지자, 명원은 감히 적에게 항거하지 못하고 군기(軍器)를 모두 강에다 넣어버린 뒤에 행재소로 후퇴하여 도망하였다. 적이 마침내 강을 건너니 이양원은 성 안에서 관동을 향하여 도망하였다. 적은 성 안에 복병(伏兵)이 있는가 의심하여 처음에는 감히 들어오지 못하다가 몰래 사람을 시켜 들어가 정탐하여 남산(南山)에 올라가 봉화불을 들게 한 연후에야 먼저 흥인문(興仁門)706) 을 통해 입성하였다.【이에 앞서 술사(術士)가 전한 말에 ‘임진년에 검은 옷을 입은 적이 동문(東門)으로 들어올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왜인들도 방위(方位)에 대한 술법을 조심스럽게 따라 매번 대성(大城)을 침범할 적이면 반드시 점을 쳐서 들어갈 곳을 가렸는데, 때로는 끝내 들어가지 않은 곳도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8장 B면


【영인본】 25책 614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註 706]흥인문(興仁門) : 동대문. ☞










"순변사 이일(李鎰)이 문경에 들어오니 성중이 이미 비어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일이 스스로 창고의 곡식을 열어 거느리고 온 군인을 먹이고 함창(咸昌)을 지나서 상주(尙州)에 도착하니 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를 중도에서 기다린다고 핑계하고 산중으로 도망하여 들어가고 홀로 판관(判官) 권길(權吉)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이 군사가 없다고 권길을 꾸짖고 뜰에 끌어내어 베고자 하니, 권길이 애걸하며 나아가서 군사를 불러 모으기를 자원하여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이튿날 아침에 겨우 수백 명을 얻어 왔는데 모두 농민이었다. 이일이 상주에 머문 지 하루 동안에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을 꼬여 모이게 하니 산골로부터 하나하나 오는 자가 또 수백 명이었다.


창졸간 군대에 편입하여 군사를 만들었으나 하나도 싸울 만한 자가 없었다. 이때 적이 이미 선산(善山)에 이르렀다. 그날 저물녘에 개령현(開寧縣) 사람이 와서 적이 이미 가까워졌다고 보고하자 이일(李鎰)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의혹시킨다 하여 장차 베려 하니, 그 사람이 크게 외치기를,


“우선 나를 가두었다가 내일 아침까지 적이 오지 않으면 죽여도 늦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이일(李鎰)이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 그날 밤에 적병이 장천(長川)에 둔쳤으니 상주까지의 거리가 20리였다. 그러나 이일의 군사는 척후병이 없었으므로 적이 가까이 와도 알지 못하였다.


○ 25일. 아침에 이일이 오히려 적이 없다고 하여 개령 사람을 끌어내어 베어서 여러 사람 앞에 돌리고 인하여 편성(編成)한 민병과 경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을 북쪽 시냇가에서 진법을 연습하느라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대장의 기와 북을 세우고 이일은 그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과 수찬(修撰) 박지(朴箎)와 상주 판관 권길과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등은 다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 있었다.


조금 있다가 두어 사람이 숲 사이로부터 나와서 배회하며 둘러보고 돌아갔다. 여러 사람은 적의 척후병인가 의심하였으나 개령 사람의 죽음에 징계되어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또 성중 두서너 곳에서 연기가 일어나는 것이 바라보였다. 이일이 비로소 군관 한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 탐지하게 하니, 군관이 말을 타고 가는데 두 마부(馬夫)를 시켜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갔다.


적이 먼저 다리 밑에 매복하였다가 조총으로써 군관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어가니 우리 군사들이 바라보고 기세가 꺾였다. 조금 있다가 적이 크게 이르러 서로 대진(對陣)하여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적이 먼저 포(砲)를 쏘아 철환이 비오듯 하니 이일(李鎰)이 대적하지 못하고 군중이 요란하여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일이 급히 군사들을 불러 활을 쏘게 하나 화살이 수십 보 쯤 가자 번번이 떨어져서 적을 해치지 못하였다. 적이 이미 좌우익으로 나누어 나와서 깃발을 들고 군사 뒤를 둘러서 포위하여 들어오면서 크게 부르짖으며 진에 돌입하였다.


이일이 급박함을 알고 말을 돌려 북으로 달아나니 군사들이 크게 요란하여 각기 도망하였으나 한 사람도 벗어난 자가 없었고, 종사관 이하는 말을 타지 못하고 모두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적이 이일을 매우 급히 추격하니 이일이 말을 버리고 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문경에 이르러 종이와 붓을 구하여 패한 실상을 장계로 올리고 물러나 조령을 지키고자 하다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충주로 달려갔다."-재조번방지






"이일(李鎰)이 출병할 때에 경중(京中)의 정병(精兵) 3백 명을 거느리고 가려고 선병안(選兵案)을 열람하여 보니 모두 보통 민간으로 저자거리에서 사는 군사훈련이라고는 모르는 자들이며, 서리(胥吏)와 유생(儒生)이 절반이나 차지하였다. 점호(點呼)할 때에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試卷)을 가지고, 서리들은 평정건(平頂巾)을 쓰고 와서 스스로 하소연하여 면제를 청하는 자가 뜰에 가득하여 뽑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이일(李鎰)이 명령을 받은 지 3일이 되어도 출발하지 못하므로 부득이 이일로 하여금 먼저 가게하고 별장(別將)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뒤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니, 이일은 다만 군관(軍官) 및 사수(射手) 60여 명만 거느렸고, 도중에 수합한 군사가 40여 명이었다. 이 때에 좌의정(左議政) 유성룡이 빈청(賓廳)에서 동렬(同列)에게 말하기를,


“숙헌(叔獻)이 매양 군사를 훈련시키고자 하였는데 당시에 일이 없었으므로 나도 또한 그것은 백성을 소요스럽게 하는 것이라 여겼더니 오늘날에 이르러 생각하니 이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재조번방지








"○ 25일에 적이 상주를 함락시키고 이어 함창(咸昌)을 함락시킨 다음, 26일에는 갑자기 문경(聞慶)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지고 현감 신길원(申吉元)은 홀로 말을 타고 산기슭으로 피해 갔는데 적이 쫓아가서 항복하라고 하였다. 길원이 분연히 꾸짖고 굴하지 않으니 적이 그의 사지를 잘라 죽였다. 《일월록》


○ 적병의 한 패는 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함락시키고, 한 패는 장기(長鬐)로부터 영일(迎日)ㆍ안동(安東)ㆍ풍기(豐基)를 함락시켰다. 수령들은 달아나고 감사 김수는 거창(居昌)으로 돌아와서 이유검(李惟儉)을 베었다. 적이 의령(宜寧)에 들어가자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이 달아났다. 이때 영남 60여 고을이 모두 무너지고 우도(右道) 6, 7고을이 겨우 전화(戰禍)를 면했으나 군졸은 이미 흩어졌다. 《일월록》


○ 28일에 적병이 충주에 들어갔다. 도순변사 신립(申砬)과 종사관 김여물(金汝岉)이 패하여 죽었다."-연려실기술






상주전투 당시 이일은 정예병 300, 서울군 6천 궁기병 , 상주민병대 1천 거느리고있었음.
















"이일이 장기(壯騎)군관 60여 인을 대동하고 길을 떠나 4천여 명의 군사를 수습하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선조수정실록


 李鎰率壯騎軍官六十餘人行, 收兵得四千餘人, 促程馳赴。




"이에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선조수정실록


吉願自出招集, 乃達夜搜索村落間, 得數百人(수백인), 皆農民也。 鎰又發倉廩, 誘募散民, 得數百人(수백인), 倉卒徧伍, 合兵僅六千餘人(합병근6000여인)。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기재사초 하 임진잡사






 


"정경세가 아뢰기를,


“근일 서울과 지방 사람들이 이일(李鎰)을 많이 헐뜯고 있습니다만 상주(尙州)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변 초기에 영남 사람들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왕사(王師:서울 군대)를 크게 기다렸고, 열군(列郡)의 군졸들은 통속(統屬)할 곳이 없었는데 이일이 상주에 이르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군사를 먹이고 성의 있는 말로 일깨움으로써 하루 사이에 장사 3천 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평야로 나아가 진을 치고 진치는 법을 배워 익힐 무렵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앞 시내에 도착하여 넓은 들판에 가득 차 있었는데도 이일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힘을 다해 싸우던 중 윤섬(尹暹)과 박호(朴箎)가 모두 전사하자 이일이 단기(單騎)로 탈출하여 충주(忠州)에 물러나 있다가 신립(申砬)과 같은 날 패배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산(釜山)에서 한번 패배한 뒤로 왜적과 대항하여 싸운 자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 유독 이일만이 군졸을 규합하여 왜적과 접전했으니, 끝내 비록 패전하기는 하였지만 그러한 사람을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증(李增)이 아뢰기를,


“왜적은 접전할 때에 모두 조총(鳥銃)으로 선봉을 삼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우리 나라는 오합지졸로 선봉을 삼고 용맹한 군사들은 뒤에 있게 하였으므로 선봉대가 무너지자 온 군대가 덩달아 도망쳤습니다. 강찬(姜燦)이 단천 군수(端川郡守)가 되었을 때 왜적과 접전하면서 잠시 전진하고 잠시 후퇴하면서 거짓으로 패하여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적의 탄환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려 군사를 내보내어 짓밟았으니, 강궁(强弓)의 아래에서 전멸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보잘것없는 적이니, 만약 세 부대로 나누어 차차 포(砲)를 쏘면서 교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더라면 어떻게 감히 당해냈겠는가.”


하였다."-선조 65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7월 24일(을미) 1번째기사


대신들과 인견하다






"25일. 아침에 이일이 오히려 적이 없다고 하여 개령 사람을 끌어내어 베어서 여러 사람 앞에 돌리고 인하여 편성(編成)한 민병과 경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을 북쪽 시냇가에서 진법을 연습하느라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대장의 기와 북을 세우고 이일은 그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과 수찬(修撰) 박지(朴箎)와 상주 판관 권길과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등은 다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 있었다."-재조번방지







4월 17일 서울 출발시 이일군 = 장기군관(정예기병군관) 60명에 군사 4천명 (4천 궁기병)






4월 25일 상주 도착 후 상주 민병대 수백명 + 수백명 (상주민병대 1천) 을 수합후 


서울에서 장사 2천(2천 궁기병)이 도착해 이일군에게 합류 = 서울 군대(경중의 군사) 6천 궁기병 , 상주 민병대 1천 






징비록엔 이일군을 정예병 300명만 적어놓고 그 외 군사수는 의도적으로 적지않고있다.




고니시 종군 중 텐카이의 서정일기에는




"4월25일 맑음, 오각에 상주에 돌입. 대장 이욱(이일의 오류)을 패배시킴. 북으로 공격하여 전과 참수 300급"  - 일본 서정일기 4월24일자


라고 적혀있다. 여기 나와있는 참수 300급은 정예병 300명의 모가지일 것이다. 







짤방의 선조수정실록을 보자.








선조수정실록 : 이일은 서울에서 정예기병군관 60명에 군사 4천을 데리고갔다.




선조수정실록 : 이일은 상주에 도착했을때는 군사가 6천여명이었다.(군관 60명당 100명씩 거느린 형태)  민병대 1천명도 별도 부록으로 추가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기재사초 하 임진잡사






당시 사관이 피란 중에 적은 기재사초 : 이일이 상주에서 얻은 군사(민병대)는 1천이었다. 




 








"25일. 아침에 이일이 오히려 적이 없다고 하여 개령 사람을 끌어내어 베어서 여러 사람 앞에 돌리고 인하여 편성(編成)한 민병과 경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을 북쪽 시냇가에서 진법을 연습하느라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 대장의 기와 북을 세우고 이일은 그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과 수찬(修撰) 박지(朴箎)와 상주 판관 권길과 사근 찰방(沙斤察訪) 김종무(金宗武) 등은 다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 있었다."-재조번방지






이일군의 편성 = 서울 장기군관 60 , 6000 군사 + 민병대 1천










프로이스 일본사를 보자. 






"....음력 4월 24일 상주라는 성채의 전방에 있는 산 위에 조선의 서울로부터 온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 저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주 단시간 내에 그들을 패주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들의 총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 이상을 무찔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나머지 적병은 울창한 숲 속으로 도주하였으므로 전부 소탕하여 전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합니다...."-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데요시의 편지




상주민병대 1천 , 정예병 300명만 죽고 나머지 이일군은 모두 숲으로 무사히 후퇴하였다. 












"이일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巡邊使)로서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지켰습니다. 적이 정탐하여 방비가 없음을 알고 밤새 재를 넘어 곧바로 나아가 성을 에워쌌습니다.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게 되자, 우리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금탄(金灘)에 빠지니,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충주는 경도(京都)의 상류에 있으니 충주를 이미 잃었으면 경성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경도 사람들은 이일·신립이 다 중병(重兵 : 많은 군사)으로 험애(險隘)를 막고 있었으므로 날마다 승전의 소식을 기다렸는데 패하였다는 보고가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또 성안(서울)의 정장(精壯)도 먼저 신립·이일과 여러 장관(將官)들이 뽑아 데려 갔고, 제도(諸道)의 원병도 미처 불러 모으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임금은 사세가 이미 급박해진 것을 알고 왕자(王子)와 재신(宰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사방에서 불러 모으게 하고, 자신은 서방으로 옮아가 상국(上國) 지방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정성을 바쳐 천자의 뜰에서 은혜를 빌어 회복을 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나라를 지키는 떳떳한 도리는 아닐지라도 또한 일을 헤아리는 권의(權宜)인데, 과연 천자의 생성(生成)하는 은혜를 입어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적변이 생긴 이래의 대체적인 사정입니다."-선조 45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윤11월 14일(갑오) 2번째기사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 유성룡을 인견하고 중국 사신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다






선조실록 : 이일군은 많은 군사다.


 


 


 


 


[출처] 이일 사료집 (『미마나 교회 (임나任那 하나로우花郞 Church)』)








"적병이 충주(忠州)에 침입하였는데 신입이 패하여 전사하였다. 처음에 신입이 군사를 단월역(丹月驛)에 주둔시키고 몇 사람만 데리고 조령에 달려가서 형세를 살펴보았다. 얼마 있다가 이일(李鎰)이 이르러 꿇어앉아 부르짖으며 죽기를 청하자 신입이 손을 잡고 묻기를,


“적의 형세가 어떠하였소?”


하니, 이일이 말하기를,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적을 감당하려니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신입이 쓸쓸한 표정으로 의기가 저상되자 김여물(金汝岉)이 말하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상촌집의 60만 왜군을 말하는 것) 우리는 적으니 그 예봉과 직접 맞부딪칠 수는 없습니다. 이곳의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방어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고, 또 높은 언덕을 점거하여 역습으로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신입이 모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 지역은 기마병(騎馬兵)을 활용할 수 없으니 들판에서 한바탕 싸우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계를 올려 이일을 용서하여 종군(從軍)하게 해서 공로를 세우도록 청하고 드디어 (이일의) 군사를 인솔하여 도로 충주성으로 들어갔다."-선조수정실록 




 


이일군 = 기마병으로 편성되어있어서 신립에게 인솔받음.  












요약 : 왜 사관의 기록인 실록,기재사초 내용을 부정하는거임 ?


 이일은 정예병 300, 서울군 6천 궁기병 , 상주민병대 1천 거느리고있었음.










고니시 유키나가의 편지가 적은 상주전투. 징비록 사극은 정말 고증을 하나도 안함. 




일본기록이 똑바로 적는 이일의 상주전투의 진실












"....음력 4월 24일 상주라는 성채의 전방에 있는 산 위에 조선의 서울로부터 온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는 대략 2만명으로 그들 사이에는 고위 지휘관으로 3명의 귀족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주 단시간 내에 그들을 패주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들의 총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 이상을 무찔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나머지 적병은 울창한 숲 속으로 도주하였으므로 전부 소탕하여 전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합니다...."<u>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데요시의 편지








그리고 정조실록에 드러난 상주전투의 진실.











정조 37권,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4월 4일(병인)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상주 유생 성재열 등의 서장에 의거해 김일을 충의단에 추후 배향할 것을 치계하다      


상주(尙州)의 옛 의사(義士) 김일(金鎰)을 충의단(忠義壇)에 추후 배향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상주 유생 성재열(成載烈) 등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 치계하기를,


“상주의 옛 의사 김일은 만력(萬曆) 임진 연간에 섬 오랑캐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옛 진사 김안절(金安節)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왜적이 점차 가까이 다가옴에 미쳐 안절이 어미가 늙었다는 이유로 피신하자, 김일이 혼자 의병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런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대군大軍으로 증연(甑淵)에 진을 쳤다가 적의 강성함을 보고 도망치고 종사관 윤섬(尹暹) 등이 죽자, 김일이 분개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향리의 의사들을 더욱 모집하여 왜적을 맞아 북계(北溪)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좌우에서 ‘적의 군사는 많고 우리는 적으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말하니, 김일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 패해서 죽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나라를 위해 한번 죽는 의리를 본받아서 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끌고 도망친 자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고는 적과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고 그의 처자식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 중 17세의 딸 하나가 있어 그의 종 영환(永還)과 곧바로 적진으로 가서 시체가 쌓인 속에서 김일의 시체를 찾아내어 거적으로 싸서 백원(白原)에 장사하였다가, 적이 평정되자 묘를 다시 쓰고 백비(白碑)5513) 를 묘 앞에 세우고서 말하기를 ‘백세(百世) 뒤에 반드시 이 비에 글을 새길 자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김안절이 기록한 사적과 죽은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정(趙靖)의 《진사일록(辰巳日錄)》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충의단의 배향하는 반열에서 유독 그만 빠져 있으니, 훌륭한 조정에서 묻힌 것을 드러내 주는 정사에 있어 의당 균등하게 베푸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배향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22장 A면


【영인본】 46책 381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正祖 37卷, 17年(1793 癸丑 / 청 건륭(乾隆) 58年) 4月 4日(丙寅)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상주 유생 성재열 등의 서장에 의거해 김일을 충의단에 추후 배향할 것을 치계하다


○丙寅/追配尙州故義士金鎰于忠義壇。慶尙道觀察使鄭大容, 據尙州儒生成載烈等狀, 馳啓言: “尙州故義士金鎰, 當萬曆壬辰, 聞島夷入寇, 與故進士金安節, 倡義起兵, 及賊鋒漸迫, 安節以母老出避, 鎰專將義兵。 巡邊使李鎰, 以大軍, 陣于甑淵, 見賊盛跳去, 從事官尹暹等死之,鎰憤慨振腕, 益募鄕里義士, 逆倭而陣于北溪。 左右曰: ‘賊衆我寡, 不可輕動。’ 鎰曰: ‘吾固知今日敗死, 而所以爲此者, 只效爲國一死之義, 將以愧棄甲曳兵者之心也’, 與賊鏖戰而死。 妻孥皆死, 有一女年十七, 與其奴永還, 直赴賊陣, 得鎰屍於積屍中, 藁葬白原。 賊平乃窆, 而樹白碑墓前曰: ‘百世之下, 必有銘此者’。 此載金安節所述事蹟及故奉常正趙靖辰巳日錄, 而獨漏於忠義壇配食之列。 在聖朝顯遂之政, 宜有均施之典。” 上特命配侑。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22장 A면


【영인본】 46책 381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징비록 사극이 숨긴 역사의 진실. 조선조정의 4월 28일 소서행장 탄금대 유인 작전 !






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7일(병오) 3번째기사


적이 상주에 이르러 통사 경응순을 보내 화친을 청하다      


적이 상주에 이르자 (조선 국왕이) 통사(通事)  경응순(景應舜)을 보내어 서계(書契)를 가지고와 (조선 국왕이 일본에) 화친을 청하고 하나의 붉은 깃발로 표신을 삼았다. 상이 이덕형을 보내어 침범한 까닭을 묻고자 하였는데 덕형이 용인(龍仁)에 이르렀을 때 적이 벌써 재를 넘은 까닭에 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태백산사고본】 13책 26권 1장 A면


【영인본】 21책 483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軍事)








4월 25일 상주전투 때 조선왕은 '통사' 경응순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었다. 


경응순은 조선국왕의 서계 그러니까 편지를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가지고왔다. 


그 내용은 화친이었다. 경응순은 조선국왕을 대신해 화친을 청하고 하나의 붉은 깃발로 표신을 삼기로 했다.






여기서 통사通事란 무엇인가 ?  통사는 사신을 수행하는 통역관으로 외교사절에 속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통사


[ 通事 ]


유형


제도


시대


고려


성격


관직


목차


정의내용


정의


조선시대 사역원에 소속되어 통역의 임무를 담당한 역관(譯官).




내용


4도목취재(四都目取才)에서 상등(上等)으로 합격한 사람을 말하나 외국에 가는 사행(使行)에 따라가는 통역관을 통칭하기도 하였다.




역관은 항시 사역원에 출사(出仕)하고 정기취재(定期取才)에 응시하여야 하였는데 이때 성적이 상등인 자를 통사, 중등인 자를 압물(押物) 또는 압마(押馬), 하등인 자를 타각부(打角夫) 등으로 불렀다.




통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상통사(上通事)·차상통사(次上通事)·소통사(小通事) 등이 그것이다. 특히, 명나라로 파견되는 사신을 따라가는 부경통사(赴京通事)는 중요시되어 취재기피자(取才忌避者)나 취재성적불량자 및 부경순번(赴京順番)을 어긴 자 등은 임명되지 못하거나, 일정기간 임명이 금지되는 등 그 선임과 파견과정이 매우 엄격하였다.




이들의 주요임무는 외국사행을 따라가 통역에 종사하는 것이었으나 국용(國用)에 소요되는 서적·약재·악기 등을 무역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육전조례(六典條例)』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역학교육(譯學敎育)」(이건형, 『대구교육대학논문집』16, 1680)


[네이버 지식백과] 통사 [通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니시 유키나가가 직접 쓴 기록을 보자.








"이 전투(4월 25일 상주전투)에서 많은 적병을 포로로 잡았습니다만, 그 가운데에는 일본어를 말하는 한 역관(경응순)이 있었습니다.


그(경응순)는 조선의 국왕에게서 다음과 같은 전갈을 저에게 전하기 위해서 파견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조선 국왕은 정세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경우, 전하의 곁에 국왕을 대신할 인질을


보낼 것이고, 일본군의 중국 원정에 즈음해서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선두에 서서 길 안내 역할을 하며 도와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전하(히데요시)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셨지않습니까. '만약 조선 국왕이 용서를 빌면 용서하여도 좋다'라고...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제(고니시 유키나가)가 몇 가지 이쪽의 요구 조건을 붙여서 앞서의 역관을 국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이 역관은 저에게 말하기를 2,3일(4월 27일~28일) 안에 매우 중요한 두 세 사람의 인물과 함께 


회답을 가지고 돌아와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낼 테니까 기다려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히데요시에게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의 편지






경응순 : 전 조선의 국왕에게서 다음과 같은 전갈을 소서행장님에게 전하기위해서 파견되어

왔습니다.  조선국왕께서는 전하의 곁에 국왕을 대신할 인질을 보낼 것이며 중국원정의 선두에

서서 길안내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 그래 ? 히데요시 전하께선 조선국왕이 용서를 빌면 용서하여도 좋다..라고 하셨지.

 그래. 우리쪽 요구 조건은 이러 이러하다. 너희 국왕에게 전해라 !


경응순 : 4월 28일에 2~3사람의 대신들과 함께 조선국왕의 항복서신을 가지고오겟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고니시 유키나가 : 오냐 어서 가라 !





===

자,  4월 28일은 탄금대전투 날짜 아님? 




근데 동일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옴.





"상주의 패전에서 왜역관(倭譯官) 경응순(景應舜)이 진중에 있다가 잡혔는데, 


평행장(平行長)이 수길(秀吉)의 서계(書契)와 예조에 보내는 공문을 응순에게 주어 내보내면서 말하기를,


“동래(東萊)에 있을 때에 울산 군수(蔚山郡守)를 생포하여 서계를 전하여 보냈는데 지금까지 회보가 없다.


【군수 이언성(李彦誠)이 적중에서 돌아와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자신이 도망쳐 왔다고 말하고 그 서계는 숨긴 채 전달하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는 알지 못했다.】조선(朝鮮)이 강화(講和)할 의사가 있으면 이덕형으로 하여금 28일에 충주(忠州)에서 나를 만나도록 하라.” 하였다. 응순이 서울에 이르렀을 때 사태가 급박하고 계책은 군색하여 혹시 이것으로 인하여 군사의 진격을 지연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였고, 이덕형 역시 가기를 자청하였으므로 예조로 하여금 답서(答書)를 짓게 하여 응순을 데리고 가도록 하였다.【그 뒤에 유언비어가 횡행하였는데 ‘왜(倭)가 장차 덕형을 강제로 옹립하여 왕을 삼고, 김성일을 정승으로 삼을 것이다’ 하여 원근(遠近)에 이 소문이 전파되면서 인심이 미혹되었는데, 북도(北道)의 군사와 백성들이 더욱 믿었으니 당시 국가가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4장 A면


【영인본】 25책 612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선조수정실록 (징비록에도 동일한 기록이 있다.)




 "상주에서 패전할 때 왜학 통사 경응순이란 사람이 이일의 군중에 있다가 적군에게 사로잡혔다. 그때 왜군의 장수 평행장이 평수길의 서신과 예조에 보내는 공문 한 통을 경응순에게 주고 내보내면서 "동래에 있을 때 울산 군수를 산 채로 잡아 서신(평수길의 편지)을 주어 보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회답이 없다. (당시) 군수는 이언함인데 적의 진중에서 돌아왔으나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도망쳐 왔다고 말하고, 그 편지는 숨기고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이런 일이 있는 줄) 알지 못한 것이다. 조선에서 만약 우리와 강화할 의사가 있다면 이덕형이 오는 28일에 충주에서 나와 만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 (조정에서는) 예조에서 답서를 만들어 경응순을 데리고 가도록 했다."-징비록






 


소서행장이 조선왕에게로 돌려보낸 경응순 : 국왕전하. 소서행장이 이리 전하라하였습니다.

 "조선이 강화할 의사가 있으면 대신 이덕형으로 하여금 4월 28일에 충주에서 나를 만나도록하라!"


이덕형 : 가겠습니다 전하 


조선국왕 : 답서를 적었다. 경응순과 함께 가도록하라. 




역시 고니시측 기록이나 다름없는 프로이스 일본사에도 동일한 기록이 있음.








"음력으로 25일(한국 날짜 26일)에 문경이라는 이름의 한 성에 도착하였습니다만 이곳은 텅 비어 있어서 바로 7리 떨어져 있는 충주라는 다른 성채로 향했습니다. 내일(일본 날짜 음력 4월 26일 = 한국 날짜 음력 4월 27일) 그곳에 다다를 예정입니다만(선발대 매복군의 도착) 


그곳에서 앞서 말한 역관과 만나기로 그에게 말해두었습니다... 어쨌든 만약에 그들 쪽에 조금이라도 무례함이 있으면 그들과 협의하는 것을 중단하고서 공격하기로 하겠습니다."-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히데요시에게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의 편지


 



"음력으로 25일(26일)에 문경이라는 이름의 한 성에 도착하였습니다만 이곳은 텅 비어 있어서 바로 7리 떨어져 있는 


충주라는 다른 성채로 향했습니다...."-프로이스 일본사 수록 고니시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에게 보낸 편지 




"아고스띠뇨(고니시)는 문경이라 불리는 곳을 출발하여 충주라는 


다른 지역으로 향하였는데,그곳에서 항복에 관한 조선 국왕의 회답을 가지고 서울에서 마중 오는 사람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아고스띠뇨는 그의 군대를 3부대로 나누었는데"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4월28일 맑음,  인각에 문경 출발, 진각에 안보 통과, 오각에 충주 도착." - 고니시군 종군 중 텐카이의 서정일기 4월27일자(일본 날짜임. 한국날짜론 4월 28일)








일본력으로 4월 25일 한국력으로 4월 26일에 문경새재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문경새재가 텅 비어있는걸 봄.


그리고 군대를 3부대로 나누고 바로 선발대(사쿠에몬+마츠우라군)에게 명령해 


충주성으로 향하게함. 




그리고 자신은 4월 28일 새벽에 충주로 출발해서 4월 28일 오후에 충주에 도착하기로 계획함.


왜냐면 충주에서 조선국왕의 항복서신을 가지고와 서울에서 마중나온 조선 대신들이


4월 28일에 충주 '단월역'이라는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곳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임.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단 그에 앞서서 혹시 모르니 선발대로 하여금 미리 잠입해 매복하게함.


그건 조선측의 혹시나 비밀스런 계략이 있는건 아닌지 정탐하고, 있다면 ! 미리 매복하게하기위해서였음 !












"신립은 말하기를 “그들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판으로 끌어들여 철기(鐵騎)로 짓밟아버리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탄금대 전투 참가 상촌신흠의 상촌집에 적힌 4월 26일 신립의 작전회의 내용 






과연 조선조정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충주로 유인하려는 작전이었음 !




신립은 조령을 안지키고 충주 달천평야에서 평야대전을 하면 100% 승리한다고 회의를 결정지었음.




그리고 신립은 척후병 목을 베며 충주 안으로 왜군이 잠입해들어오든 신경쓰지않았음.




유인한게 아니라면 신립이 이런 행동들을 보일 까닭이 없음.




신립의 대군은 매복해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기다리고있었음. 






"이달 27일에 적이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는데, .... 신입이 또 알지 못하였다. 


이튿날(28일) 새벽에 적병이 길을 나누어 대진(大陣)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左軍)은 달천(達川)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右軍)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선조수정실록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4월 26일에 적은 이미 조령을 넘어왔는데, 신립의 군관 한 사람이 듣고 와서 보고하자, 다음날 아침에 신립은 또 군사를 미혹하게 한다고 해서 목을 베어서 군중에 조리를 돌렸다."-서애집










"저녁 무렵(27일 저녁) 한명의 군졸이 달려와서 신립에게 고하기를 왜군이 이미 조령을 넘어 


이곳에 다다랐습니다. 하니 신립이 너무 놀라 펄쩍뛰면서 성을 나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는데 


이로 성중은 크게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신립은 갑옷을 벗고 낡은 옷을 입고 성 밑에 있는 주막에 잠입하여 그 밤을 지내려고 했는데 


이 밤에 일본군이 오는 형세는 없었다.  


겁 많은 (부하의) 태도를 조롱하여 꾸짖고, 거짓을 꾸며 고했다고 분하게 여겼다.  


(28일) 동이 틀 무렵 성내로 돌아가자고 청하는 자를 붙들고 목을 베어 버렸다." -회본태합기








"음력으로 25일(한국음력 26일)에 문경이라는 이름의 한 성에 도착하였습니다만 이곳은 텅 비어 있어서 바로 7리 떨어져 있는 


충주라는 다른 성채로 향했습니다.... 아고스띠뇨(고니시)는 문경이라 불리는 곳을 출발하여 충주라는 


다른 지역으로 향하였는데,그곳에서 항복에 관한 조선 국왕의 회답을 가지고 서울에서 마중 오는 사람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아고스띠뇨는 그의 군대를 3부대로 나누었는데, 선봉을 맡았던 그의 병사들이


가토 도라노스케의 병사들과 마주쳤다. 도라노스케의 병사들은 아고스띠뇨와는 다른 길로 해서 왔다. 그런데


아고스띠뇨군의 선봉장은 고니시 사쿠에몬이라는 독실한 천주교도 귀족인데, 아고스띠뇨가 히고에 소유한 가장


주요한 성의 장수로 원래부터 용기가 있고 매우 충성스러운 가신이었다. 도라노스케가 그를 앞질러 선두에 가려고 하자 고니시 


사쿠에몬은 직설적으로 다음과 같이 그들을 비난했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이렇게 늦게 도망자처럼 온 것인가? 아고스띠뇨 혼자서


그 병사들과 함께 조선국의 태반을 정복한 것이다. 우리가 많은 성을 빼앗고 수많은 적을 물리치는 


동안 당신들은 모습 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게다가 아고스띠뇨가 선봉을 가고 있는 것은 관백의 명령에


따르고있는 것을 알아야할 것이다." 이 일로 쌍방은 매우 심한 언쟁을 하고 자칫하면 무기를 들고 싸울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도라노스케와 히젠노쿠니의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후방에서 그곳까지 오는 도중에 큰 강에 맞닥뜨렸을 때, 전체 병력을 건네줄 배가


없어서 겨우 2000명의 병사 밖에는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도라노스케는 겨우 그 정도의 병력만으로 아고스띠뇨의 선발대를


앞지른 것인만큼, 결국 분을 안으로 삼키면서 다시 후방에 처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의 실패 이후 내내 그 일을 가슴 속


깊숙이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요약 : 



4월 25일 통사 경응순 : 4월 28일에 조선조정은 충주에서 조선국왕의 항복편지를 들고와 항복하겠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 응 ? 머야 이거 ;; 진짜인가 ? 






경응순 : 병.신 저거 이미 속았당께 ㅋㅋㅋㅋ 저놈 충주로 이제 4월 28일 탄금대전투 날짜에 오면 


신립장군의 8만 대군에게 모가지가 달아난당께 ~ ! 












4월 26일 문경새재의 고니시 유키나가 : 헉 정말 문경새재,조령이 텅텅 비어있어 ! 


 불안하다. 선발대 사쿠에몬+마츠우라군을 바로 충주로 조령을 통해 '몰래' 보내자 !




4월 27일 밤 : 사쿠에몬.마츠우라 충주 단월역에 도착. 가토군 2천과 마주침. 가토를 자신의 후위로 만들어버림.




4월 28일 새벽 - 사쿠에몬,가토군이 충주성 근처에 매복.  





4월 28일 새벽 - 소서행장 출발



4월 28일 오후 - 소서행장 충주에 도착. 매복하고있던 신립의 8만대군을 만남 !















"4월28일 맑음,  인각에 문경 출발, 진각에 안보 통과, 오각에 충주 도착. 충주부 북쪽 반리 지점 송산松山에 

신입석(申立石) 장군이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결진. 대주(종의지)와 섭주(소서행장) 병력이 공격하여 전과 참수 3000급, 포로 수백명. 적 대장 신입석 전사." - 고니시군 종군 중 텐카이의 서정일기 4월27일자(일본 날짜임. 한국날짜론 4월 28일)






 


 


[출처] 디시에 올린 탄금대 글




상주 전투에 조선군은 2만명 대군大軍이 이일 바로 뒤에 와있었다.






징비록 사극이 숨긴 상주전투 변기군 2만의 참전








조령의 방어사이자 조방장인 변기는 상주 전투에 참전했음. 그 증거가 연려실기술에


상주전투에서 변기가 전사한것처럼 잘못 기록되어있음. 그리고 선조수정실록에 변기의 종사관인 이경류, 이일의 종사관인 박지가 상주전투에 이일과 함께 참전해있었다고나옴.


변기의 종사관도 이일의 종사관 , 이일과 함께 와있으니 변기두 와있는거임.


고니시 유키나가는 상주에 이일 뒤에 있는 조선군을 대략 2만명이라고 봄.  


그게 바로 변기군 2만이었음






서애집 ,상촌집 기록에 의하면 상주전투 이후 변기군은 이일군과 함께 신립군에게로 합류함.




정조실록에도 상주전투 당시 조선군이 대군大軍이라고 분명히 나옴.








"대신(大臣) 및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청대(請對)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글로 아뢰어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서 중로(中路)로 내려가고, 성응일(成應一)을 좌방어사(左防禦使)로 삼아서 동로(東路)로 내려가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서 서로(西路)로 내려가고,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鳥嶺)을 지키고, 경주 부윤(慶州府尹) 윤인함(尹仁涵)은 나약(懦弱)하므로 강계 부사(江界府使)로, 변응성(邊應星)을 경주 부윤으로 삼되 모두 군관(軍官)을 자기가 선택하여 맡은 곳으로 달려가게 하였다. 이 때에 여러 신하들이 날마다 궐하(闕下)에 모여서 방비할 대책을 강구하나 어찌할 계책이 없어 둘러 앉아서 황급할 뿐이었다. 어느 사람이 건의하기를,

“적이 창과 칼을 잘 쓰는데 우리는 단단한 갑옷이 없으니 어찌 막아내리요. 그러므로 적을 당하지 못하니 두꺼운 쇠로써 온몸에 두른 긴 갑옷을 만들어 입으면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도 찌를 만한 틈이 없을 터이니 우리가 이길 수 있겠다.”

하니, 여러 사람이 그렇다고 여겨 이에 칠공들을 많이 모아서 밤낮으로 두들겨 만들었다."-재조번방지 




[출처] 유성룡의 자백 (『미마나 교회 (임나任那 하나로우花郞 Church)』)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8번째기사


왜적이 상주에 침입하자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다      


왜적이 상주(尙州)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였다. 처음에 경상 감사 김수(金晬)가 적변(賊變)을 듣고는 곧바로 《제승방략(制勝方略)》에 의거하여 군대를 분배시킨 뒤 여러 고을에 이문(移文)하여 각각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약속된 지역에 나아와 주둔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조령 밑의 문경(聞慶) 이하 수령들이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大邱)로 달려와 둔병하여 원야(原野)에서 노숙하였는데 전혀 통제가 되지 않은 채 순변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적의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많은 군사가 놀라 동요하여 밤중에 진이 저절로 무너졌는데 수령들이 단기(單騎)로 도망하여 돌아왔었다.


그 뒤에 이일이 비로소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는데 그때는 이미 고을이 한 사람도 없이 텅 빈 상태였다. 이에 스스로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들을 먹이고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산곡(山谷)에 들어가 숨었다. 이일이 판관 권길(權吉)을 잡아들여 군대를 뽑도록 당부하였으나 한 사람도 얻지 못하였으므로 참(斬)하려 하였다. 이에 권길이 스스로 나가 불러 모으겠다고 하고 밤새도록 촌락 사이를 수색하여 수백 명을 얻었는데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또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유인해 모집하여 수백 명을 얻고 나서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니 군사의 총수가 6천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왜적은 이미 선산(善山)에 이르렀다. 저물녘에 개령(開寧)사람이 와서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리자 이일이 여러 사람들을 미혹시킨다고 하여 참(斬)하였다. 이일의 군사는 척후(斥候)가 없는데다가 백성들이 또한 감히 알리지 못했기 때문에 적병이 벌써 상주 남쪽 20리 되는 냇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도 알지 못하였다. 이일이 한창 상주 북쪽 냇가에서 습진(習陣)하고 있었는데 얼마 있다가 고을의 성 안 몇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으므로 이일이 그제서야 군관 박정호(朴挺豪) 등을 시켜 가서 탐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이 이미 숲 사이에 잠복하여 있다가 즉시 총을 쏘아 죽이고는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갔다. 정호는 본래 용사(勇士)로 유명하여 군인(軍人)이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꺾일 정도의 인물이었다.


적이 마침내 크게 집결하여 포환(砲丸)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겁에 질려 활을 쏘면서도 시위를 한껏 당기지도 못했다. 군대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이일은 곧바로 말을 달려 도망하였으며 군사들은 모두 섬멸되었다. 종사관(從事官)인 홍문관 교리 박호(朴箎)·윤섬(尹暹), 방어사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 판관 권길이 모두 죽었다. 이일은 군관 한 명, 노자(奴子) 한 명과 함께 맨몸으로 도망해 문경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대죄(待罪)하고, 다시 조령을 넘어 신입의 군진으로 향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26권 3장 B면


【영인본】 25책 612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25일에 적이 상주(尙州)를 함락시키자 순변사 이일(李鎰)이 달아나 충주로 돌아왔다. 종사관(從事官)인 교리(校理) 윤섬(尹暹)ㆍ박지(朴箎)와 방어사의 종사관인 병조 좌랑 이경류(李慶流)ㆍ판관 권정길(權井吉)이 죽고, 조방장 변기(邊璣)도 죽었다."-연려실기술










난중잡록 임진년 상上편의 상주전투 기록






"25일.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매, 이일(李鎰)이 대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날 새벽 안개가 자욱할 무렵 포성이 들려 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당도했음을 바로 알아채고 이일이 성 밖 북천(北川)에 나가 진을 치다.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다. 종사관 박지(朴篪), 이일의 종사관이다. 이경류(李慶流), 변 기(邊璣)의 종사관이다. 윤섬(尹暹)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살해되었고, 이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려 충주(忠州)로 돌아오다. 박지는 김수의 사위다. 그때 나이는 22세,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되었었다. 박지가 자기 군중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하여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박지는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함양(咸陽) 사람 인언룡(印彦龍)을 만나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받았건만 지금 전쟁이 불리해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용안(龍顔)을 뵙겠나.”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다."-난중잡록









"임진란에 조정에서 변기(邊璣)를 보내어 조령을 지키게 했는데, 신립이 충주에 이르러서 변기를 휘하로 불러들여 조령의 방어를 포기하였다.

적이 고갯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수일간을 배회하면서 여러 번 척후로 자세히 살펴 복병이 없음을 알고 난 후에 비로소 조령을 통과했다."

- 서애집 잡저(雜著)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잡저(雜著)  조령(鳥嶺)에 성을 쌓다

[출처] 유성룡의 자백 (『미마나 교회 (임나任那 하나로우花郞 Church)』)








"4월 26일 충주(忠州)에 도착했을 때 ...  이 군사로 단월역(丹月驛) 근방의 언덕에 진을 쳤다. 


이때 이일을 만났는데 이일로 선봉을 삼아 그로 하여금 공적을 세워 보답하게 하였다."-상촌집 








"....음력 4월 24일 상주라는 성채의 전방에 있는 산 위에 조선의 서울로부터 온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는 대략 2만명으로 그들 사이에는 고위 지휘관으로 3명의 귀족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주 단시간 내에 그들을 패주시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그들의 총대장을 비롯하여 1000명 이상을 무찔렀습니다.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서 나머지 적병은 울창한 숲 속으로 도주하였으므로 전부 소탕하여 전멸시킬 수 없었던 것은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합니다...."<u>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에 수록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히데요시의 편지</u>






정조 37권,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4월 4일(병인)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상주 유생 성재열 등의 서장에 의거해 김일을 충의단에 추후 배향할 것을 치계하다      


상주(尙州)의 옛 의사(義士) 김일(金鎰)을 충의단(忠義壇)에 추후 배향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이 상주 유생 성재열(成載烈) 등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 치계하기를,


“상주의 옛 의사 김일은 만력(萬曆) 임진 연간에 섬 오랑캐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옛 진사 김안절(金安節)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왜적이 점차 가까이 다가옴에 미쳐 안절이 어미가 늙었다는 이유로 피신하자, 김일이 혼자 의병을 지휘하였습니다. 그런데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대군大軍으로 증연(甑淵)에 진을 쳤다가 적의 강성함을 보고 도망치고 종사관 윤섬(尹暹) 등이 죽자, 김일이 분개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향리의 의사들을 더욱 모집하여 왜적을 맞아 북계(北溪)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좌우에서 ‘적의 군사는 많고 우리는 적으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말하니, 김일이 말하기를 ‘내가 오늘 패해서 죽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은 단지 나라를 위해 한번 죽는 의리를 본받아서 저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끌고 도망친 자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고는 적과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고 그의 처자식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 중 17세의 딸 하나가 있어 그의 종 영환(永還)과 곧바로 적진으로 가서 시체가 쌓인 속에서 김일의 시체를 찾아내어 거적으로 싸서 백원(白原)에 장사하였다가, 적이 평정되자 묘를 다시 쓰고 백비(白碑)5513) 를 묘 앞에 세우고서 말하기를 ‘백세(百世) 뒤에 반드시 이 비에 글을 새길 자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김안절이 기록한 사적과 죽은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정(趙靖)의 《진사일록(辰巳日錄)》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충의단의 배향하는 반열에서 유독 그만 빠져 있으니, 훌륭한 조정에서 묻힌 것을 드러내 주는 정사에 있어 의당 균등하게 베푸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배향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22장 A면


【영인본】 46책 381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正祖 37卷, 17年(1793 癸丑 / 청 건륭(乾隆) 58年) 4月 4日(丙寅)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상주 유생 성재열 등의 서장에 의거해 김일을 충의단에 추후 배향할 것을 치계하다


○丙寅/追配尙州故義士金鎰于忠義壇。慶尙道觀察使鄭大容, 據尙州儒生成載烈等狀, 馳啓言: “尙州故義士金鎰, 當萬曆壬辰, 聞島夷入寇, 與故進士金安節, 倡義起兵, 及賊鋒漸迫, 安節以母老出避, 鎰專將義兵。 巡邊使李鎰, 以大軍, 陣于甑淵, 見賊盛跳去, 從事官尹暹等死之,鎰憤慨振腕, 益募鄕里義士, 逆倭而陣于北溪。 左右曰: ‘賊衆我寡, 不可輕動。’ 鎰曰: ‘吾固知今日敗死, 而所以爲此者, 只效爲國一死之義, 將以愧棄甲曳兵者之心也’, 與賊鏖戰而死。 妻孥皆死, 有一女年十七, 與其奴永還, 直赴賊陣, 得鎰屍於積屍中, 藁葬白原。 賊平乃窆, 而樹白碑墓前曰: ‘百世之下, 必有銘此者’。 此載金安節所述事蹟及故奉常正趙靖辰巳日錄, 而獨漏於忠義壇配食之列。 在聖朝顯遂之政, 宜有均施之典。” 上特命配侑。


【태백산사고본】 37책 37권 22장 A면


【영인본】 46책 381면


【분류】 *인사(人事) / *윤리(倫理)


 


 


 








요약 : 조령의 방어사이자 조방장인 변기는 상주 전투에 참전했음. 그 증거가 연려실기술에


상주전투에서 변기가 전사한것처럼 잘못 기록되어있음. 그리고 선조수정실록에 변기의 종사관인 이경류, 이일의 종사관인 박지가 상주전투에 이일과 함께 참전해있었다고나옴.


변기의 종사관도 이일의 종사관 , 이일과 함께 와있으니 변기두 와있는거임.


고니시 유키나가는 상주에 이일 뒤에 있는 조선군을 대략 2만명이라고 봄.  


그게 바로 변기군 2만이었음






서애집 ,상촌집 기록에 의하면 상주전투 이후 변기군은 이일군과 함께 신립군에게로 합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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